본문 바로가기

우리들의 것들

부여 부소산에 가면 ....

 

부여 부소산에 가면....

 

 

부여 팔경

 

백제탑의 저녁노을,

구룡평야에 내려앉은 기러기 떼,

백마강에 고요히 잠긴 달빛,

규암나루에 들어오는 돛단배,

수북정에서 바라보는 봄날 백마강가의 아지랑이,

고란사의 은은한 풍경소리,

낙화암에서 애달프게 우는 소쩍새,

노을 진 부소산에 간간이 내리는 부슬비.



◇…부소산 부소산성

부소산은 나지막한 구릉이다.

남쪽은 산세가 완만하여 앞쪽에 시가지를 이루고, 북쪽은 가파른 절벽으로 백마강과 맞닿아 있다.

낮으나 우뚝한 절벽이 성벽처럼 막아서고 그 아래 백마강이 해자처럼 두르고 있어

전쟁 시 최후의 보루가 되는 부여의 진산이라 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또한 백제시대 평상시 궁궐의 후원이었다는 부소산은 '산'보다 '원'이라는 명칭이 더 잘 어울린다싶게

평화롭고 운치 있는 산책을 보장한다.


부소산 속에 부소산성이 있다.

산정에는 머리띠처럼 둘러쌓았고 그 주위에 다시 경사면의 흙을 다져 축대를 쌓아 더욱 가파른 효과를 낸

성곽이 부소산을 감싸고 있다. 흙과 돌을 섞어다진 산성은 그 자체가 오히려 걷기 좋은 흙길처럼 보여

처음에는 쌓아 만든 것이 아닌 저절로 생겨난 숲길이라 생각할 정도다.

잘 정비된 산길에서 때때로 이탈해 산성을 밟으며 도토리 한두 개 줍는 것,

잘생긴 소나무를 만나는 것이 큰 감흥으로 남아 있다.


유명한 낙화암과 고란사도 부소산 안에 있고,

백제말엽 의자왕에게 충성을 바친 삼충신을 추모하는 삼충사,

부소산 동쪽 산봉우리에 자리한 영일루,

백제가 패망할 때 7일 밤낮을 불탔다는 군량 창고 터인 군창지,

부여의 시가지가 한눈에 보이는 반월루, 백제시대의 움집터,

부소산성에서 제일 높은 자리로 원래 달구경을 했다는 사자루,

낙화암에서 꽃처럼 진 궁녀들을 기리는 사당 궁녀사,

부소산 서남쪽 기슭에 있는 서복사지, 충령사와 하동 정씨 정려각 등이 부소산 안에 있다.

가을빛깔이 시작되고 있는 부소산 산길은

이 모든 것들을 숨기듯 하다 활짝 드러내 걷는 박자에 강세가 되어 준다.


◇…낙화암과 백마강

낙화암. 삼국유사에는 타사암(墮死巖)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사람이 떨어져 죽은 바위'라는 뜻이다.

타사암이 낙화암이 된 것은 조선시대로, 우암 송시열 선생이 삼천궁녀를 꽃에 비유해 낙화암이라

고쳐 불렀다 한다. 삼천이라는 숫자는 그만큼 많은 여인들이었다는 뜻일 것이다.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의 군사들과 소정방의 당나라 군사가 연합하여 백제를 칠 때,

그녀들은 이곳 부소산 끝자락에서 백마강으로 뛰어들었다.


나무 울타리 쳐진 낙화암에 서면 꼭 전망대 같다는 생각이 들지만 시원스러운 전망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강은 수풀로 반쯤 가려져 이곳에 섰던 여인들 생각만이 오롯하다.

낙화암 바위위에 작은 육각정자인 백화정이 날아갈 듯 앉았는데, 이곳의 전망이 크고 넓다.

정자는 낙화암에서 몸을 던진 여인들을 기리기 위해 1929년에 '부풍시사'라는 시모임에서 건립했다.

정자에 오르면 처연한 백마강이 멀리서부터 걸어온다.

백마강은 부여를 흐르는 금강의 이름으로 백제 사람들은 사비강, 백강이라 불렀다.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이 강을 건너려 할 때 갑자기 안개가 자욱해지며 지척을 분간할 수 없었고,

강물이 소용돌이쳐 건널 수 없었다고 한다.

의자왕의 부왕인 무왕이 용이 되어 백마강을 지키고 있기 때문이었고,

소정방은 백마를 미끼로 용을 낚아 올렸다 한다. 그래서 백마강이다.

용을 지켰다면 백제의 역사는 변하였을까. 100년이 넘게 한 나라의 도읍이었던 부여,

나라는 역사 속에 있지만 그 이름은 지금도 부여다.


◇…고란사

완만하게 오르던 길은 낙화암에서부터 가파르게 내려가고, 백마강을 손에 잡을 듯 지척에 두고

작은 절집 고란사가 있다. 암자라 할 만한 규모의 고란사는 백제 말기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할 뿐,

자세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원래는 백제의 왕들을 위한 정자였다고 하고,

궁중의 내불전이었다고도 하고, 백제가 멸망할 때 낙화암에서 몸을 던진 궁녀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고려 초기에 지어진 것이라는 설도 있다. 절 이름은 뒤쪽 바위에서 자라는 고란초에서

그 이름을 땄다고 하는데, 고란초를 백과사전에 찾아보면 부여의 고란사 뒤 절벽에 자라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명이 있다. 닭과 달걀의 오랜 딜레마가 고란사와 고란초에도 있는 듯하다.


고란사는 백제 임금님이 매일 마셨다는 약수로 유명하다. 한잔 마시면 3년이 젊어진다는 고란약수,

옛날 어느 할아버지가 너무 많이 마셔 아기가 되었다는 그 약수다.

구비되어 있는 스테인리스 그릇에 길다란 손잡이가 달려 있는데, 그 길이보다 샘이 깊어 허리를 꺾어

저절로 샘 속의 나를 보게 된다. 고란약수 한잔에 3년을 얻었으니, 덤 같은 생,

삶으로 돌아가는 가파른 돌계단이 그리 힘들지 않다.

 

 

부여 부소산에 가면 보고 싶은 곳들이다.

 

 

가야산방님의 블로그에서 발췌 

 

'우리들의 것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물에서 시에서 배운다  (0) 2010.09.24
ROTC17기 2010년 하계수련회 - 대 백제의 부활의 현장을 가다.  (0) 2010.08.30
곱창구이  (0) 2010.07.28
유행하는 신조어 - 5  (0) 2010.07.13
유행하는 신조어 - 4  (0) 2010.07.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