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운의 불가사의 그 다섯 번째는 변해버린 식성이다.
불가사의 다섯은 잡식성인 내 식성,
나의 변해버린 몬도가네식 식문화도 불가사의 중에 하나이다.
살모사 내장도 날로 먹어 보았고, 곤달걀, 식용개구리, 메뚜기볶음,
가재, 번데기, 뱀고기 구이, 멍멍탕, 닭의 생간, 소의 생간, 닭똥집, 곱창, 순대,
머릿고기, 소 등골, 각종 내장류, 참새구이, 양, 천엽, 오도리(새우 산채로),
소 혀, 제비집, 상어고기, 고래 고기, 보리개떡, 쑥버무리, 소고기 육회,
육사시미, 닭발, 돼지껍데기, 추어탕, 홍어회(홍탁)등
인간이 먹을 수 있는 먹을거리는 일부러 피하거나 등을 돌리거나 입에 넣을 때 주저한 적은 없다.
즉 남들이 먹는 것이라면 내가 못 먹는 것은 없다는 이야기가 된다.
뿐만 아니라,
처음 먹어보는 다른 나라 웬만한 음식도,
이상한 향이 나는 음식도
그들 앞에서 찡그리지 않고 무엇이든 잘 먹는다.
상하거나 맛이 간 음식이 아니면 가리지 않고 잘 먹는다.
하지만, 나의 이러한 식성은 어릴 때부터 생긴 것은 결코 아니다.
내 어린 시절,
어머니는 멸치 갈치 꽁치 고등어 삼치 이면수 도루묵 청어 조기 동태
준치 굴비 전어 양미리 등 가시가 많은 생선들을 자주 식탁에 올리셨지만
나는 생선에는 가시가 많은 것은 질색이었다.
가시가 목에 걸려 고생도 해 보았고
가시를 골라 발라서 먹느라고 생선 먹는 것이 몹시 귀찮아하였다.
아버지는 일부러 바싹 구운 생선을 뚝뚝 입으로 잘라 토막을 내어서 뼈째 가시가 있는 채로
꼭꼭 씹어서 다 드시곤 하셨는데 일부러 큰 아들이 보고 배우도록 시범을 보이신 것을
커서 깨달았지만 그 당시는 뼈째로 씹어 먹는 것은 야만스럽다고 생각했었다.
특히 우동이나 찌개에 들어있는 멸치를 씹으면 큰일 난 듯한 표정을 지으며
바로 뱉어내며 불평을 했었다.
아버님은 내 모습을 보시고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시며
‘허어 칼슘이 많은 메루치를 와 버려 꼭꼭 씹어서 다 먹어야지’ 말씀하시고
당신이 멸치의 대가리까지 씹어서 삼키시며 아들에게 시범을 보이셨다.
그 시절 난 음식의 모양이나 향기나 색깔이나 여물기가 이상하면 고개를 가로 저으면서
안 먹을 거야, 또는 못 먹어 식이었고 만약 나도 모르고 먹었다면
바로 입 밖으로 뱉어내곤 하였다.
따라서 식탁에서 아버지로부터 야단도 많이 들었었다.
한마디로 먹는 것에는 제법 까다로운 아이였었다.
아이스크림은 너무 차가와서 이가 시리다면서,
초코렛은 너무 달기도 하고 쓰기도 하다면서,
사탕은 너무 딱딱하다면서,
케익은 느끼하다고,
사과는 시다면서,
수박은 속이 허옇고 아직 달지 않다면서,
참외는 씨를 먹으면 이상하게 설사가 난다고,
우유는 마시면 즉시 배가 아프다고,
사이다나 콜라는 목이 따갑고 먹은 후 트림이 나오면 코가 찡하게 아프다면서,
당근은 달큰하다고,
멸치는 냄새가 이상하다고,
풋고추는 맵다면서,
돼지고기는 기름이 많아 느끼하다면서,
버터에 밥을 비벼주면 느끼하다고,
새우 젓갈은 너무 짜고 비리다고,
생선은 가시가 너무 많다,
이것은 너무 짜다, 저것은 너무 싱겁다,
참기름이 너무 많이 들어가서,
이상한 냄새가 나는 나물이 들어 있어서,
밥이 질어서, 밥이 되서, 국수가 퍼져서,
우동이 너무 뜨거워서 못 먹겠다는 둥 밥상머리 투정을 어지간히 하였던 기억이 난다.
계란프라이도 너무 익었다, 너무 안 익었다,
시금치는 냄새가 싫다....
처음 먹는 음식은 이것이 무엇이냐, 맛이 어떠냐, 무얼로 만들었나 하면서
일일이 따져 묻는 쪼잔한 성격이었다.
하지만 거식증이나 소식증은 아니었다.
그저 음식에 대하여 가리면서 까다로웠던 편이었다.
그랬던 내가 중학교 2학년 때 친구들과 기도원에 가서 첫 외박인 야영을 하였다.
계곡 물에서 친구들과 가재를 잡았다.
친구들이 즉석에서 냄비에다 산 채로 가재를 넣고 간장을 붓고
버너로 끓여 빨갛게 익힌 가재를 껍질째 씹어 먹으며
야 맛있다 하면서 내게 먹어보라고 했다.
나도 따라 먹게 되었다.
그리고 논에서 벼메뚜기 잡아서 마른 풀에 구워 친구들과 함께 나눠 먹기도 하였다.
친구들과의 단체생활과 공동생활에서 남들이 먹는 것은 나도 먹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내 식성은 다양한 음식에 서서히 적응을 하기 시작하였다.
대학교 시절 돼지 비계냄새가 풀풀 나는 삼겹살을 처음 먹게 되었고
생선회도 그 시절 처음 경험을 하게 되었으며
이상한 냄새가 났던 피자도 그 시절 여자친구(지금의 아내)가 사주어서 처음
먹게 되었다.
다녔던 대학교의 독특한 문화적 특성상 선배가 사주면
이유를 달지 않고 무조건 먹어야 했고,
막걸리를 우동그릇에 가득 채우고 입을 떼지 않고 원 샷으로 먹어야 한다면
시킨 대로 마셨고 안주는 노란 무(다꾸앙, 단무지) 또는 김치 한 조각이었다.
특히나 생각하지도 않았던 ROTC에 외삼촌의 권고로 입단을 하게 되면서부터
나는 갑자기 남자다워져야 했다. 그리고는 선배의 명령과 상사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고
굳게 생각하며 하면 된다는 군인정신을 함양하게 되었다.
훈련과 교육과 자대 근무를 통해서 범생 황득수는 점점 바뀌고 있었다.
특히 자대배치 후, 육군 장교는 남들이 하고 남들이 먹는 것은 못하는 것이 없어야 하고
못 먹는 것이 없어야 한다는 굳은 신념을 갖게 되었다.
남들이 먹을 수 있다는 것을 내가 먹지 못한다면 장교가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어릴 땐, 뱀만 쳐다봐도 머리가 쭈뼛대고 온몸에 소름이 돋았었던 내가
전방에서 직접 살모사도 잡아서 이빨에서 독도 빼고,
목을 따고, 껍질도 벗기고,
꿈틀대는 알몸의 뱀을 나뭇가지에 감아서 싸리나무 불에 구워서
소금이나 된장에 찍어서 뼈째 씹어대는 만용을 보였고,
송곳니로 맥주병마개, 사이다병마개를 가볍게 칙칙 따기도 하고,
숟가락으로 병마개를 팡팡 따기도 잘 땄다.
친구들이 잘한다 잘한다 하니까 신이 나서 계속 병마개를 땄다.
최전방 민통선 안에 있는 청청한 개울가에서 초봄에 잡은 식용개구리는
반합에 식용유를 1/3 정도 붓고 식용유가 끓을 때
살아있는 개구리를 던져 넣어서 튀긴 다음 젓가락으로 건져내어 대나무 소쿠리에 담고
기름이 밑으로 빠지고 약간 식은 후에 맛소금에 살짝 찍어서
뒷다리를 잡고 한 입에 넣고 훑어서 먹었다. 소주 한 잔에 개구리 한 마리가 정량안주이다.
개구리 한 마리를 입안에 넣고 먹고 나면 3개의 딱딱한 뼈가 입안에 남게 된다.
하나는 활처럼 굽은 개구리 턱뼈요 짧은 두개의 뼈는 개구리 앞다리 뼈이다.
뼈는 툭툭 뱉어내면 된다. 가끔 개구리 쓸개 맛이 씁쓸하게 느껴지지만 문제가 될 수 없다.
당시 개구리 튀김은 구수하고 맛있어서 앉은 자리에서 약 10마리는 가볍게 먹어치웠다.
아버님은 내가 전방근무를 하고 있을 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들을 찾아 면회를 오셨다.
화천 읍내에서 대낮부터 부자간에 대작을 하게 되었다.
아버님은 소주 4홉들이 한 병과 식용개구리 튀김 한 접시 그리고 곤달걀 한 바구니를
주문하셨다. 곤달걀은 무척이나 쌌다.
웬만한 사람은 징그러워 거들떠보지도 못하지만
난 아버님의 그 아들이라는 증명을 해 보이기 위해서라도 껍질을 대충 까서
되다 만 병아리 털을 손으로 떼어낸 후 왕소금에 쿡쿡 찍어서 소주 안주로 삼아서
맛있게 먹었다.
그리고 아버지와 난 멍멍탕을 식사로 먹었다.
완전한 몬도가네 식사를 부자간에 나누었던 것이다.
내가 남들보다 멍멍탕을 잘 먹고 또 예찬론을 펴자 친구들은 내게 별명을 붙여 불렀다.
황구였다. 우리말로 옮기면 ‘ㄸ개’였다.
멍멍탕 맛있게 끓이는 방법은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중개(특히 시골에서 이것 저것 가리지 않고 먹은 황구)를 주재료로 하고
들통(20리터들이)에 물을 붓고 멍멍이 토막을 크게 내어서 넣고, 된장, 깐 6쪽 통마늘,
생강 덩어리를 넣고 센불로 한참을 끓이다가 고기가 어느정도 익었다 싶으면 다시
대파를 깨끗이 씻어서 반토막으로 꺾어서 많이 넣어준 다음 뚜껑을 닫고
다시 끓이다가 약한불로 완전하게 고기가 다 익으면 은근하게 작은 불로 푹 끓여준다.
수육을 먹기 위해서는 손으로 고기를 찢어야 제 맛이 난다.
수육이 뜨끈할 때 찍어서 먹는 양념장은
들기름에 들깨가루, 식초, 마늘다진 것, 생강다진 것, 고추장, 된장을 섞어서 잘 혼합을 한
다음 마지막으로 겨자를 제법 넣어서 다시 비벼준 것으로 먹어야 제맛이 난다.
기호에 따라서 깻잎을 끓는 탕에 넣어 건저먹기도 하고
정구지(소풀, 부추)를 넣어서 같이 끓여 건져 양념장에 찍어 먹기도 한다.
깻잎은 향기를 내어 주고,
부추는 간에 좋다고 해서 같이 끓여 먹는다.
물론 후추는 넣어도 좋고 안 넣어도 괜찮다.
아버님 생전에 가끔 고향에 내려가면 고향집에서 키우시던 오리를 잡아
오리탕을 끓여 주시는데,
최근에는 내가 직접 오리의 목을 비틀어 따고 거꾸로 들어서 피를 뺀 후
뜨거운 끓는 물에 오리를 푹 담가서 털을 뽑고, 오리를 잡는다.
물론 오리의 생간은 잘라서 소금에 찍어 먹기도 하고 삶아서 미리 건져먹기도 한다.
모래주머니는 반으로 갈라서 속 껍질을 제거하고 왕소금으로 비벼 깨끗이 씻어
굽든가 삶아서 소금에 찍어먹기도 한다.
생긴 것은 순진해 보이는데 하는 짓은 거의 백정이다.
어릴 때 걸핏하면 울고 말도 제대로 못한다고 핀잔을 얻어 들으며 컸던 나,
숫기가 없어서 남들 앞에 제대로 서지도 못하고 자기주장도 똑바로 못하였던 나,
먹는 것도 이것저것 골라 먹고 음식타박도 많았던 내가
육해공군 불문하고 못 먹는 것이 없는 몬도가네 주인공이 되었고
내손으로 오리를 때려잡는 사나이가 되어 있다.
하지만 그렇게 메마르지 않은 중년으로 거듭나고자 노력하고 있음은 그나마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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