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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운이야기

지뢰밭은 애초에 없었다.

지뢰밭은 애시당초 있지도 않았다.

 

단지, 

배치받은 우리 대대가 강원도 하고도 최전방이고

민간인 통제선 안에 위치하였으며

때는 여름 잡풀과 녹음이 우거지고 

야간 공제선만이 어슴프레 보이던 주변 야산들의 음산한 분위기때문이었다.

 

하늘같은 16기 선배들은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별도 달도 보이지 않아서

칠흑같이 어두운 1979년 6월 밤에

자대 배치를 받아 긴장과 피곤함으로 쉬고만 싶은 17기 동기들에게

맥주와 됫병 소주를 박스채 들여놓고 비오큐에서 성대한(?) 신고식을 시작하였고

술기운이 오를 만 하니까, 갑자기 군기가 빠졌다고 생트집을 잡으며 밖으로 집합하라고 명령하였다.

이크 이제 시작이구나

본능적으로 경계심을 갖추고 긴장하며 총알같이 군화를 신고 밖으로 튀어 나갔다.

한 선배가 술기운에 몸을 약간씩 가누지 못하며 부동자세로 서 있는 11명의 동기생들에게

낮고 조용하며 비장한 목소리로 이야기 했다.

 

 

'잘 들어라, 귀관들이 전방에 바라보고 있는 야산을 넘으면

바로 괴뢰들이 남으로 총구를 겨누고 있는 이북이다.

이곳이 말로만 듣던 최전방 민통선 안에 위치한 여러분이 2년 근무하게 될 68FA다.'

 

'여러분이 들어서 알고 있을 것으로 믿지만 6.25 휴전이후에 저 야산을 넘어서

수많은 공비와 간첩들이 넘어왔고 이 부대의 선배 장병들의 목과 귀를 잘라 다시

북으로 넘어간 곳이 바로 이곳이다.'

'그리고, 여러분이 서 있는 이 풀밭은 비록 영내에 있다 해도 미확인 지뢰밭이다.

따라서 함부로 발을 내 디뎠다가 발목이 날라갈 수 있으니 매우 조심하기 바란다.

아직 전방에는 이와 같이 지뢰 발굴을 끝내지 못한 지역이 많다.

 

'오늘 자대에 배치를 받은 첫날 자랑스런 ROTC 후배 장교들을 진심으로 환영하며

지금부터 전역하는 그 날까지 무사히 사고없이 부대근무를 잘 하려면 반드시

미확인 지뢰밭을 통과하는 의례를 가져야 한다. 이것이 바로 68포병대대의 전통이다.

오늘 입대한 17기 전 동기들이 무사히 이 지뢰밭을 한 사람의 낙오자나 발목부상자 없이

통과할 수 있기를 바란다. 지금부터 지뢰밭 통과요령을 알려주겠다.

 

'지뢰밭을 통과할 때는 야간 정숙보행으로 걸음을 걸어야 하고 한 발 한 발 발끝부터 뒷꿈치로

디뎌야 하고 발을 높이 들어서 돌에 걸리거나 풀에 걸리지 않도록 매우 조심해서 걸어야 한다.

그리고 앞사람 뒷사람의 손을 모두 잡고 앞사람이 디딘 곳을 밟아야 하므로 앞사람 뒷꿈치가

떨어지자 마자 뒷사람의 발끝이 정확하게 앞사람의 뒷꿈치 위치에 발을 디뎌야 한다.'

 

'자기 멋대로 발을 헛 딛이거나 한 눈을 팔다가 지뢰가 터지면 17기 동기들의 명예는 실추되고

본인은 부상을 당하게 되어 평생 불구자로 살아갈 것이다.

내 부주의로 애꿎은 동기를 다치게 하는 일을 절대로 없어야 한다.'

 

 

모두 잘 할 수 있겠나 !.... 모두 '예' 하였다.

 

'자. 그러면, 지금부터 이 지형을 가장 잘 아는 16기 000 선배가 가장 선두에 위치하여 지뢰밭을

통과하겠다. 000 선배의 손을 잡고 천천히 17기 모두가 뒤를 따르기 바란다.

 

'출발'

 

칠흑같은 밤, 가랑비가 추적 추적 내리는 밤 16기 000 선배의 손을 놓칠세라

발자국의 위치를 놓칠세라 극도의 긴장 속에서 17기 동기 11명은

손에 손을 잡고 조용하게 조심조심 한발 한발을 떼어 놓았다.

약 1분을 이리저리 걸어서 이동을 멈추었다.

 

'모두 무사히 지뢰밭을 빠져 나왔나? 하고 물었다.

예 모두 무사합니다. 하고 동기들은 대답하였다.

 

'그래 수고가 많았다. 이렇게 정신을 통일하고 집중하면 죽지 않는 것이다.

앞으로 부대 근무는 이와 같이 매사에 서로 협동하여 서로 아끼고 돕고 정신을 집중하여

성공적으로 마치고 무사하게 사랑하는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기 바란다.'

 

우리 모두는 지뢰밭 통과를 무사히 했음을 다행으로 생각하고 휴우하고 긴 숨을 내 몰아쉬었다.

그리고 다시 BOQ로 들어가서 술을 새벽까지 마셨던 자대배치 신고식인 지뢰밭 통과식이 떠올랐다.

 

어제 18기 동국대학교 김영식 후배의 어머니 장례식장에 모인

당시 68FA 17기, 18기 전우들이 조문을 마치고

 

28년전 부대에서 같이 땀을 흘리고 고생하였던 이야기를 하였다.

양상용 권준원 이희경 황득수(17기)와

주경윤 이희훈 양승욱 김득녕 김영식(18기)

9명의 68FA 선후배들이 정말 오래간 만에 만나게 되었다.

 

양승욱 후배가 갑자기 지뢰밭 통과의례를 떠 올렸고

당시 18기 동기생 YYY는 그 때 그 분위기가 하도 공포스러워 울면서

'선배님 차라리 저를 지뢰밭으로 넣어주세요'하였다고 기억을 해 내어서 모두 웃었다.

그래서 내가 물었다. 자네들도 지뢰밭을 통과했었나?

 

후배 왈 '아이고 선배님 왜 그러십니까?

바로 황선배님이 지뢰밭 통과의례를 주도 하셨잖아요

와 그때 너무 심했어요.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는데.. 기억이 생생합니다..'

 

내가 그랬다고? 정말?

사실 난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우리가 자대 배치받았을 때 선배들로부터 받은 신고식 기억은 생생한데....

내가 똑 같이 18기 후배들에게 말도 되지 않는

쇼를 주관하였다고??? ㅋㅋㅋ.

만약 그렇다면내겐 연극배우 끼도 좀 있었는가 보다.

 

그 전통이 아직까지 후배들에게 전해지고 있는 지는 모른다.

어째든 지뢰밭은 부대 안에 애시당초 없었으며 그저 잡풀이 자란 벌판이었다.

함께 웃을 수 있고 잊지 못하는 기억으로 남아 있는

지뢰밭 통과 의식은 나름대로 의미가 크다고 생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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