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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야기

어머니와 설날

11년 전에

부모님은 고향 산청으로 낙향을 하신다고 하여

살고 계시던 한성빌라의 이삿짐을 싸셨고 서울 생활은 이제 그만 하시겠다고 하시며

두 분은 훌쩍 떠나셨다.

자식들 잘 키우시기 위해서 정든 고향을 떠나 서울로 올라 오신지 만 35년 만에

이제 두 분의 몫을 다 해 놓으시고 정든 고향으로 낙향하셨다.

그 사이에 4명의 아들 딸 모두 잘 키우시고

모두 시집 장가 들이시고

모두 자리 잡고 잘 사는 모습을 보시고 73세의 연세가 되셨기에

공기 좋고 물 맑고 산이 아름다운 고향 산청

그리운 곳, 할아버지 할머님이 묻혀 계신 고향으로 돌아 가셨다.

 

그러면서 집안의 제사와 차례는 장남인 내게 자연스럽게 물려졌고

그 후 내가 제사와 명절 차례를 지내오고 있다.

그리고 부모님께서 연로하시고 고향에 계시다 보니

장남인 나와 맏며느리인 아내가 해야 할 일들이 더욱 많아졌고

이제 아버님께서 돌아가신 후엔 집안의 대 소사를 더욱 챙기고 신경을 쓰게 된다.

 

아내와 난 우리가 결혼 한 후 친척들의 결혼식에 참석한 일들을 떠 올려 보았다.

결혼 후 아내와 난 우리 집안의 22건의 결혼식에 참석을 했었다.

물론 처가 쪽 결혼식에도 많이 참석을 하였지만..

그리고 앞으로도 수 많은 결혼식, 그리고 장례식 조문, 기타 이런 저런 일들을 챙기게 될 것이다.

장남 맏며느리가 그래서 쉽지 않은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작년 11월 아버님께서 돌아가신 후

어머님은 홀로 고향에서 지내 오셨는데

이번 설엔 동생이 내려가서 어머니를 모시고 올라 와서

어머니를 모시고 모두 같이 설에 차례를 모실 수 있어서 기뻤고 어머니 역시 기뻐하셨다.

 

아버님이 살아계실 땐 설이라 하더라도 자주 올라 오시지 않고

고향에서 두 분이 주변 친척들과 함께 즐겁게 어울리시며 지내셨는데

아무래도 이번 설은 아버님을 여읜 후라서 어머니 혼자 고향에

계실 수는 없기에 동생이 내려가서 모시고 왔다.

 

아내는 아버님 여읜 후에

제사 상도 새로 구입하고 제기 세트도 장만하였고,

항상 그러했듯이

차례상 음식을 정성을 다해서 준비하였다. 

어머니도 차례상을 준비하는 맏며느리 아내를 도우셨다.

 

설날 아침, 

손자 손녀 세배를 받으시고 어머니는 세뱃돈을 나누어 주셨다.

태호 2만원 나머지 아이들에게는 1만원씩 절값을 주시면서 공부 잘 하라고 당부하셨고

아이들은 할머니 건강하시고 오래오래 사세요 하였다.

 

아내는 어머니께 절값으로 쓰시라고 돈을 드렸고

동생네, 누나네, 그리고 취직한 진석이가 사촌형이 재현이가 어머니께

절값으로 쓰시라고 용돈 하시라고 돈을 드렸다.

 

설날 사촌 큰형집에 가서 차례를 모시고

다시 우리 집으로 와서 차례를 모시고 온 일가 친척들이 둘러 앉아서

음식도 먹고 이런 저런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인천 큰 삼촌, 숙모, 연신내 작은 삼촌 사촌 형들 세 명, 조카 유동이, 수동이 부부, 명진이 부부

예림이 예지, 서림 서라, 태호 용호, 영수 부부, 우리 부부, 어머님 모두 22명이 모였다.

 

가장 어르신인 어머니께 세배를 드리고 모두 건강하시라고 용기를 드렸다.

어머니는 기뻐하신다.

오랜 만에 많은 일가 친척을 한 자리에서 다시 보시게 되니 당연히 기쁘시다.

손님들이 모두 빠져 나가고

차례를 마친 누나네 식구들이 찾아왔다.

아이들도 세배하고 세뱃돈도 받고 모두 기쁜 얼굴들이다.

누나네는 어머니를 모시고 수유리로 가고, 동생네는 동두천으로 돌아갔다.

우리는 청량리 처가로 갔다.

오전에는 친가에서 오후에는 처가에서 자식된 도리를 다 하는 생활은 오래 된 일이라

표준화가 되어 있다. 

 

밤이 되어서 다시 어머님이 계신 누나네에 들러서 윷놀이 놀고

어머님이 좋아하시는 고스톱을 치고 밤이 늦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설날을 알차게 보람있게 보냈다.

 

다음 날은 옛 생각을 떠올리며 미아리 옛날 살던 동네를 돌아보기로 하여

어머님을 승용차에 모시고 살던 곳을 둘러 보았다. 

살던 집은 다 헐려서 흔적도 없고 모두 고층 아파트 숲이 되었으니

옛 생각을 더듬어 볼 수가 없었다.

내가 다녔던 미아국민학교는 새로 건물도 다시 지었고 예쁘게 바뀌어서 몰라보게 되었다.

그런데 학교 앞에 문방구와 오래된 주택가는 다행이 옛 모습을 지니고 있어서 반가왔다.

 

그리고 토요일엔

어머니를 모시고 아버님 유골이 안치되어 있는 하늘문 추모관을 찾았다.

아버님이 계신 곳에 가서 우리는 추모를 하였고

장모님도 찾아 뵙고 추모를 하였다.

이천 호국원이 빨리 개장을 하면 5월 초 아버님의 유골을 이장할 것이다.

 

 하늘문 추모관에서 아버님을 만나 뵙고 생각에 잠기신 어머니

 

 

아내는 시아버님께 추모를 드리고(사랑관 25호)  그리고 친정어머님(사랑관 22호)께 추모를 드렸다.

시설이 깨끗하고 서울에서 가까우며 조용하고 포근한 추모관 분위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

 

 

아버님 유골이 안치된 사랑관 25호실,

이곳에 아버님은 임시로 안치되었고 5월 이천에 국립호국원이 개원을 하자마자 이장을 하게 된다.

 

 

일요일엔

동두천 동생 집으로 어머니를 모시고 갔다.

서울에 오신 김에 1~2주 더 머무르시다가 고향에 내려가시도록 말씀드려서

그러겠노라고 하셔서 동두천에 계시도록 모셔다 드렸다.

저녁을 먹고 동생과 이런 저런 비즈니스 이야기도 하고 가족간의 이야기도 하였다.

 

동생이 사진관 사업을 한 지 오래 되었고 이제 세 군데에 shop을 운영하는

규모로 발전하여 참 기쁘고 대견하여 자랑스럽다.

동두천 보산동 가게와 미 2사단 내에 사진관, 용산 미군부대 내에 사진관,

그리고 인터넷 쇼핑몰을 운영하는 사이버 매장을 운영하여 훌륭하게 자식들 키우고

가정을 일으키고 있기에 참 보기가 좋다.

 

현대사진관은 동두천시 보산동, 이 위치에서 20년이 넘었다.

동생 영수가 인수하여 벌써 약 15년은 되었을 것이다. 동생은 이 곳에서 결혼도 하였고 서림과 서라를

낳아 길렀고 이젠 어엿한 토박이가 되어 간다.

 

 

사진 촬영, 사진 현상, 인화, 출장 촬영으로 시작한 사진관에는

이제 조각 목걸이 선물 소품 특이한 아이디어 상품들을 진열하여 외국인들의 눈길을 끌고 판매를 한다.

인터넷 쇼핑몰을 구축하여 판매를 하고있다.

 

  

 앨범, 티셔츠, 시계, 목걸이, 어린이 용품, 액자, 등 등 없는 것이 없다.

 

 

쿠션에 사진을 인화한 제품

 

 

어머니는 사실상 이제 특별히 신경 쓰실 일도 없고

힘든 일 하실 필요도 없으며

건강하시고 즐겁게 오래 사시면 된다.

 

설날 추석날 생신일 아버님 제사일에는 서울로 모시고 와서 같이 지내고

그 외에는 우리 자식들이 찾아 뵈며 고향에서 같이 지내면서

오래 오래 건강하게 사시기를 자식들 모두 기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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