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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야기

어머님과 함께 찾은 남이섬

9월 9일 일요일에
 
어머님과 누나 자형 그리고 아내와 함께
남이섬을 찾았다.
 
어머님은 약 30여년 전쯤 남이섬을 한번 와 보셨었다.
요즘 많이 달라진 남이섬을 어머님은 구경도 못하셨다.
 
아버님께서 서울의 병원에 입원하여 계신 동안 어머님은 서울에 올라와 계신다.
산청에 귀향하신 지 10년 만에 가장 오랫동안 서울에 머무르시고 계시다.
아버님 병문안을 가셨다가 모처럼 교외로 나들이를 하기로 하여 남이섬을 찾아가서 예전에
사시던 기억을 더듬어 보기로 한 것이다.
남이섬으로 찾아가는 길, 가득 들어선 좌 우측의 식당과 모텔 등
크고 화려한 왕복유람선을 보시고는 너무도 변해버린 남이섬 주변에 혀를 내 두르셨다.
강을 건너시며 흐르는 강물과 강건너 산들과 남이섬을 번갈아 바라보시며
어머님은 추억속으로 빠져 드셨다. 
 
46년전 겨울
살고 있던 정든 남이섬이 팔려서 우리 식구는
엔진이 달린 쇄빙선에 이삿짐을 싣고 꽁꽁 얼어붙은 북한강을 
통통선 뱃머리에 달린 쇠뭉치를 떨어뜨려
뱃전의 두꺼운 얼음을 깨면서 천천히 배를 몰아서 남이섬을 떠나 서울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어머님은 당시 38세였고
누나는 9살
난 6살이었다.
 
1960년도 남이섬엔 총 4가구가 살고 있었다.
우리집과 고모부집 그리고 또만이 아저씨(박도만씨로 기억함)네와 정선이네 집
4개의 집이 너른 남이섬에 자리잡고 살고 있었다.
 
아버님은 황소와 염소를 키우셨다.
우사(축사)에는 황소를 키우셨고, 염소는 간단한 나무 널판지로 듬성 듬성 담을 쌓아서
염소들을 가두고 비를 맞지 않도록 대강 지붕을 이어 놓았었다.
 
염소들이 남이섬의 북쪽에서 맘껏 풀을 뜯어 먹을 수 있도록 아버님은 도랑을 깊게 파서
밭작물을 심어 놓은 남이섬의 남쪽으로 건너 오지 못하도록 하셨다.
 
지금의 남이섬 한 가운데 남아 있는 오래된 기와집은 앞강을 바라보고 지어 놓은 고모부 댁이었고
우리집은 조금 떨어진 곳에 뒷강을 향해 지어 놓은 집이었다.
그리고 고모집에서 남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또만이 아저씨 집과 그 아래에 정선이네 집이
있었다.
 
남이섬에서 뒷강을 배로 건너서 아래쪽으로 내려가면 방하리에 방성초등학교가 있고
방성초등학교를 다녔던 아이들은 나의 작은 누나와 고모부 집의 6촌 형 그리고 서너명의
초등학생이 전부였다.
 
겨울엔 하도 추워서 방안에 윗목에 담아 놓은 물그릇의 물이 꽁꽁 얼고
벽에는 온통 성에가 꽃을 가득 피웠었다.
매년 북한강은 꽁꽁 얼어붙었고 장작을 가득 실은 도라꾸(트럭)도
두껍게 얼은 북한강 얼음 위로 다닐 정도였다.
얼음 갈라지는 소리는 무시무시 했다. 쩌-정- 찌찡 밤이나 새벽에 얼음이
수축 팽창 현상으로
긴 틈을 내며 갈라지는 소리다.
 
누나와 형들이 모두 강 건너 학교에 가고 나면 난 혼자서 굴렁쇠를 굴리면서 섬을 돌아다니며 
놀았다. 누나와 형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면 난 뒤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이것 저것 형들과 누나들이 같이 노는 것을 바라보기도 하였고, 아니면 아버님이 소먹이를 주시거나 염소가 음메헤헤
하면서 풀을 뜯는 것을 쳐다보기도 하였다.
겨울엔 썰매타기, 여름에 물가에서 장구치고, 가을엔 들판에서 이것 저것 먹을거리를
얻기도 하고 봄에는 삐삐를 뽑아먹기도 하고 사시사철 굴렁쇠를 굴리며 놀던 어린 내게
하루 해가 길지는 않았다.
 
어른들은 가평에 장이 서는 날,
나무 배에 같이 타시고 장을 보러 갔다가 오신다.
 
가뭄이 심할 때는 뒷강은 물이 줄어서 무릎까지 바지를 걷고 걸어서 건너갈 때도 있었다고 한다.
홍수가 나면 북한강 상류에서 수많은 것들이 넘실대는 황토물과 함께 섬으로 밀려 내려왔고
어린 아이들은 물가에 가까이 나갈 수가 없었다.
 
남이섬 앞강 중간 쯤에 나룻터가 있었고 조금 걸어서 올라오면
우물이 큰 것이 하나 있었던 기억이 난다.
아버님께서 어른 팔길이 만한 크기의 잉어를 우물가에서 잡아서 손질하시던 것이 기억에 난다.
두레박으로 우물물을 퍼서 잉어를 씻고 잉어의 검은 쓸개를 조심조심 아버님께서 분리하여
한 잎에 꿀꺽 목으로 넘기시던 기억이 난다.  
 
어린 나에게는 뛰어 놀기 좋고 먹을 것이 지천에 깔려있는 지상 낙원과 같은 놀이터였던
남이섬이었겠지만 생활을 책임지고 계신 부모님께는 남이섬이 척박한 곳이면서 외로운
벽지 마을에 불과했으리라.
아버님은 염소를 파시기 위해 서울에 가시기도 하였다.
그리고 염소 파신 돈을 전대에 싸서 허리에 두르고 경춘열차 비둘기호를 타고 돌아오셨다.
 
공군조종사이시던 외삼촌이 정찰기를 몰고 남이섬 상공을 굉음과 함께 수건을 흔드시며
낮게 저공비행을 하면 남이섬 사람들은 큰 구경거리였었다.
 
어머님은 지금은 허리가 완전하게 구부러지셔서 조그만 할머니가 되셨지만
내가 어릴 때는 키가 크시고 호리호리 하셔서 별명이 키큰 아주머니였었다.
어머님은 남이섬을 떠나실 때 키가 크신 아줌마였었다.
나는 코흘리개 6살백이 어린아이였었다.
 
그랬던 어머님은 84세의 꼬부라진 할머니가 되셨고
나는 흰머리가 희끗희끗한 52세의 중년이 되어서 남이섬에 돌아 온 것이다.
남이섬은 옛 모습을 희미하게 간직한 채 이제는 국제적인 명소로 거듭 태어나서
모처럼 기억을 더듬으러 찾아오신 어머님께는 생소한 남의 고향같으신 모양이다.
하지만 남이섬회사의 민웅기 회장님과 만나서 이런저런 대화를 하시니
그 때 그 기억이 되 살아 나시는 것 같다. 남이섬은 민영덕(내게 고모부님)의 삼촌 되시는 분의
소유였는데, 당시 1억에 경춘관광이라는 회사에 팔렸다고 들어 기억하고 계신 아버님의
말씀을 떠올리셨으며 정희누나도 이곳 남이섬에서의 추억과 기억을 많이 떠올려
민웅기 회장님께 전해드렸다.
 

 남이 장군 묘를 지나서 잣나무길 - 휠체어에 의지하신 어머님을 모시고

 

 

 46년 전 고모부님이 사시던 집을 개조하여 남이섬회사의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다.

 

 

 어머님과 누나 그리고 자형

 

 

38세의 어머님 9살의 정희누나 6살이었던 내가 다시 남이섬에 함께 찾은 나이는 84세, 55세, 52세가 되었다.

  

 

 

 아버님도 병상에서 일어나시면 같이 모시고 남이섬에 다시 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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