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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야기

황씨(黃氏)의 역사(나의 뿌리)

 

황씨동원각(黃氏同源閣)

황씨동원지편집위원장 황일수(黃逸秀)

2001년 11월 15일 발행

하우기획 인쇄

황씨동원각 발행


황성(黃姓)의 기원

중국 삼황(三皇) 

太昊伏羲氏(태호복희씨, 天皇), 炎帝神農氏(염제신농씨, 地皇), 黃帝軒轅氏(황제헌원씨, 人皇) 중 황제헌원씨가 황성의 원조이고 근원이다. 황성의 시조인 육종공(陸終公)은  헌원황제의 6세손이다. 황제헌원씨는 중국 하남성 신정경내 옛지명 희수에서 태어나 희씨라고도 하며 황제시대 때 많은 발명 창조가 있었는데 양잠을 하여 실을 뽑고 주거 궁실 문자 음율 산수 주역 의학 등이 있다.

황제헌원은 111세로 장수하였고 부인 3명을 거느려 25명의 아들을 두어 그 중

14개 성의 득성자(得姓者)로 시조가 되기도 한다.


우리나라 황씨의 원조 황락(黃洛)의 셋째 아들인 황병고(黃丙古)의 계손인

황충준(黃忠俊)이 창원황씨의 시조이다. 고려 성종조에 문하부시중(門下付侍中)을 역임하였다. 황충준을 시조로 하는 시중공파(侍中公派)가 가장 벌족하지만 시조를 황석기(黃石奇)를 파조(派租)로 하는 회산부원군파(檜山府院君派)가 있고 대상(大相)을 지낸 황석주(黃石柱)를 파조로 하는 대상공파가 있고 조선조 공조전서(工曹典書)를 지낸 황윤기(黃允奇)를 파조로 하는 전서공파와 고려조에 태사(太師)를 지낸 황호(黃昊)를 파조로 하는 태사공파와 고려조에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지낸 황간(黃侃)을 파조로 하는 상서공파 등으로 나누어져 있다.


창원은 본래 신라의 굴자군(屈自郡)과 골포현(骨浦縣)의 땅인데 경덕왕 때 의안군과 합포현으로 고쳐 합포현을 의안군의 영현으로 만들었다. 고려조 현종 9년(1018년) 금주의 속현이 되었다가 의안을 의창으로 합포를 회원으로 고쳐 현으로 승격하였다. 조선조 태종 때 두현을 합쳐 창원으로 고쳤고 1895년에 군이 되었으며 1914년에는 웅천군을 병합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주요 성씨로는 황 박 정(丁) 감(甘) 공(孔) 구(具) 유(兪) 정(鄭) 현(玄)씨등이 있었다.


시중공파는 1세조 휘신의 대를 이어 강원도 철원일대를 창원황씨의 세천지로 지켜 터를 정하고 살았고 첨정공파(僉正公派)는 7세 황순경의 자손들 중에서 8세 황린의 대부터 15세 황도희의 대에 걸쳐 보은 청주 대덕 김해 경산 진주 달성 현풍 창원 함안 마산 등지로 흩어져 같으며 일부 자손들이 논산 옥천 양산 울주 시흥 거제 등지에 자리잡았던 것으로 보인다.


창원황씨의 공파는 아래와 같다

시중공파 첨정공파 의창군파 판관공파 도정공파 통덕랑공파 첨지공파 현감공파 주부공파 군수공파 봉교공파 직장공파 조랑공파 영춘공파 서담공파 영흥공파 참판공파 학생공파 등이 있다.

첨정공파

첨정공파는 회산부원군계에 속하며 회산부원군을 지낸 황석기를 시조로 한다.

1세 석기(石奇) - 2세 상(裳) - 3세 윤단(允端) - 4세 수(琇) - 5세 균(均)

(시조)           (공정공)                       (첨정공)


6세            - 7세 공로(公老) - 첨정공파로 발전함


회산군 황석기와 아들 황상의 행적은 고려사에 자세히 실림

황석기는 원나라의 귀족으로서 공민왕비인 원(元)의 노국공주(魯國公主)를 배행하였고 충혜왕~공민왕의 5조를 섬겼다. 충혜왕 3년(1342) 지신사(知申事)로서 조적의 난을 진압하고 1등 공신이 되었다.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를 지내고 충정왕 1년(1349) 도첨의참리(都僉議參理)로서 회산군(檜山君)에 봉해졌다. 공민왕 5년(1356)에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가 되어 2년 뒤 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門下恃朗同中書門下平章事)에 승진했으나 다음 해에 파직되었다.

황상은 공민왕 5년(1356) 판추밀원사(判樞密阮事)-홍건적의 침입 때 왕을 호종하고

교주강릉도도만호(交州江陵道都萬戶)가 되어 왕경을 수복하는데 1등공신이 됨

찬성사(贊成事)에 올라 회성부원군(檜城府阮君)에 봉해짐 - 활을 잘 쏨

황신(黃信) - 고려말에 공부상서 정토장군을 지냄

장무공(蔣武公) 황형(黃衡)은 성종 11년(1480) 무과 및 진현시 급제 - 무과중시 장원 혜산진첨절제사에 특진함 중종 5년(1510) 삼포왜란때 전라좌도방어사가 되어

왜군을 무찌르고 경상병마절도사. 도총관. 지훈련원사를 거쳤다.

1512년 함경도 지방에서의 야인의 반란을 진압하고 평안도 함경북도의 병마절도사를 거쳐 공조판서에 이르렀다.

黃琦(경기도관찰사,1539) 黃暹(선조,대사헌) 黃應奎(1594 同知敦寧府事)

黃愼(선조, 공조판서 호조판서) 黃璡(선조, 이조판서) 黃璨(임진난 도호부사)

黃一浩(1638년 의주부윤) 黃欽(예조 이조판서) 黃梓(1750 영조 호조참판)

黃寅儉(1760 대사헌, 1765 대제학 형조판서) 黃嗣永(정조 진사 1801년 신유박해)

황사영백서사건으로 사형당함

黃學秀(1903년 참위로 근무 - 상해 - 만주 - 독립운동 광복군 사령대리 1962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단장 수여)




장무공 황형(黃衡)

1459 3.1. 황해도 출생

1479. 정경부인원주원씨와 결혼1480(성종11년) 진현시 장원급제

1486 27세에 문과중시 장원급제 - 절충장군으로 혜산진병마절제사로 제수

여진족 침략 격퇴 - 의주목사 - 회령부사 - 자헌대부 - 경상좌도병마절도사

간신배의 모함으로 사임 은둔 - 1510년 중종 5년 삼포왜란 참전하여 300명

목을 베어 잡음 - 경기도절제사에 특진 - 간신배의 시기로 낙향 - 지훈련원사 -

북로와 전적을 위해 함경북도절도사 제수 -공조판서 - 강화에 낙향 연미정

경내 거처함 - 1520. 12. 2. 사망

20리 떨어진 문수산성을 넘고 있는 하인의 이름을 부르니 되돌아 왔다

공의 성량이 크고 태산같았다고 함 공의 여식이 원주에서 살림을 잘 하지 못함을

보고 하인중 책임자를 매로 다스리며 잘 가르치지 못함을 꾸짖음.

 

朝鮮朝 十九人名將錄

최윤덕 임경업 이순신 이준 신립 심총 정충신 이완 정봉수 곽재우 허종 임경업 황형

등 중 1명임.


연미정(燕尾亭) : 경기도 강화군 강화읍 월곶리 바닷가 언덕위에 위치하며 장무공

황형장군의 말년에 낙향하여 지내던 곳 제비꼬리와 같이 생긴 바닷가


창원 회산 황씨가문 시호조는 시조 공희공 공정공 장무공 민익공 문민공 충열공

6위이다. 그리고 정 3품의 관직을 116위께서 역임하신 바 있다.     


회산부원군계의 항렬자(行列字)는 다음과 같다.

32세 柱( ) ( )東

33세 ( )烈 惠( )

34세 圭( ) ( )培

35세 ( )欽 錫( )

36세 洙( ) ( )泰

37세 ( )均 榮( )



황씨는 

평해황씨(平海黃氏)

장수황씨(長水黃氏)

창원황씨(昌原黃氏)

상주황씨(尙州黃氏)

우주황씨(䋅州黃氏)

회덕황씨(懷德黃氏)

덕산황씨(德山黃氏)

성주황씨(星州黃氏) 등이 있다



황(黃)씨

황씨는 문헌에 163본관이 전하나 현재는 55개의 본관이 있다.

우리나라 황씨의 시초는 중국 후한 때 유신(儒臣) 이었다는 황락(黃洛)으로 전해진다.

그는 서기 28년(신라 유리왕 5년)에 장군 구대림(丘大林, 평해 구(丘)씨의 시조)과 함께 교지국(交趾國, 옛 월남의 한지방)에 사신으로 가던중 폭랑을 만나 평해에 도착하여 청착하여 살면서 황장군이라고 하면서 우리나라 황씨의 시초가 되었다고 한다. 현재에도 평해(경북 울진군 평해읍) 월송(越松) 지역에는 황장군의 묘가 전해지며, 구(丘)장군이 살았다는 곳을 구미진(丘尾津)이라 부른다.

일설에는 황락의 후손에 갑고(甲古), 을고(乙古), 병고(丙古) 3형제가 있었는데 각각 기성(현 평해)군, 장수군, 창원백에 봉해져서 각각 본관을 평해, 장수, 창원 황씨로 하였다고 한다.

현재 전하는 제안, 항주를 제외한 대부분의 황씨는 이 3본에서 분관 되었다고 한다.

[참고] 황락과 구대림이 우리나라에 온것은 서기 28년(중국 후한)에 월남으로 가는 도중이라고 하나, 평해구씨의 기록은 663년(중국 당나라)에 일본으로 가는 도중이라고 한다.

창원황씨(昌原黃氏)

창원황씨는 본관을 같이 하면서도 각각 선조를 달리하는 8파가 있는데, 이들 8파 사이의 상호관계에 대해서는 뚜렷하게 밝혀진 것이 없으며, 족보도 각기 따로따로 편찬한다.

시중공(侍中公)파 : 황신. 토황(土黃)으로도 불리운다.

공희공(恭僖公)파 : 황석기(회산군). 당황(唐黃)으로도 불리운다.

호장공(戶長公)파 : 황량충.

예빈동정공파 : 황성찬.

전서공파 : 황윤기.

호장공파 : 황우용.

규정공파

시중공파의 시조 황신의 원조는 고려때 문하시중을 지낸 황충준이며 그후의 세계는 알수가 없으나, 창원황씨가 확실하다고 한다.

공희공파의 파조 황석기(黃石奇)는 원래 고려 공민왕 때의 중서문하 평장사이었다. 종래에는 그가 원나라 사람으로 고려 공민왕 때 노국공주를 수행하여 고려에 온 것으로 전해졌으나, 이미 이전에 그는 고려에서 여러 벼슬을 지내고 1339년에 '조적의 난'을 평정하는 등 활약한 사실이 '고려사'에 뚜렷이 기록되어 있다.

1348년 고려 제29대 충목왕이 죽자 황석기는 이제현(李齊賢)과 함께 원나라에 가서 30대 충정왕의 승습(承襲)을 청하게 되었는데, 그 이듬해에 앞서 원나라에 와 있던 공민왕(江陵大君)이 원나라 위왕(衛王)의 딸 노국공주와 결혼하여 귀국하게 되자 황석기는 그때 따라 왔던 것이다.

[가문의번영]

[ 시중공파 ]

·황자(梓) : 부제학, 대사헌을 역임하고 동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와 기행문 '갑인연행록'과

'경오연행록'을 편술하였다.

·황인검(仁儉) : 황자의 큰아들. 형조판서를 지냈다.

·황인점(仁點) : 황자의 둘째 아들. 영조의 딸 화유옹주와 결혼, 정조 때에는 동지 겸

사은사가 되어 일곱 차례 청나라에 다녀왔다.

[ 호장공파 ]

·황사우(士祐) : 호조, 예조, 이조판서를 거쳐 우찬성을 역임하였다.

·황응규(應奎) : 황사우의 아들. 이퇴계의 문하생으로 임진왜란 때 절충장군에 오르고

돈녕부지사를 지냈다.

·황섬(暹) : 황사우의 손자. 부제학, 대사헌이 되었으나, 계축옥사(1613) 이후 낙향하여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소북파의 영수로 영의정을 지낸 유영경(柳永慶)의 처남이다.

[ 공희공파 ]

·황상(裳) : 황석기의 아들. 문하찬성사·서강도원수 등을 지냈다.

·황형(衡) : 황상의 6세손. 공조판서를 지냈다.

·황기(琦) : 황형의 아들. 직제학·대사간을 거쳐 도승지, 경기도 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황신(愼) : 황형의 증손. 이율곡(李栗谷)의 문하생으로 정여립의 옥사(1589) 때 정언(正言)으로서 대신들이 서로 직언을 회피한 사실을 논박하다가 좌천되기도 하였으나, 후에 공조, 호조판서를 지냈다.

이 밖에 창원황씨의 인물로는

·황구하(龜河) : 영조 때 노론의 중진으로 이조판서를 지냈다.

·황사영(嗣永) : 신유박해 때 순교한 백서(帛書)사건의 주인공이다.

·황기천(基天) : 순조 때의 명문장이며 명필이다.

·황재영(在英) : 고종 때의 학자이다.

·황필수(必秀) : 명의(名醫)이다.

[ 인 구 ]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220,810명이 있었다.

평해황씨(平海黃氏)

시조 황온인(黃溫仁)은 황락장군의 후손이라고 한다. 황은인은 고려 때 금오위장군 태자검교를 지내고 평해에서 대대로 살았으므로 황온인을 1세조상으로 하고 본관을 평해로 하였다.

[ 대표적 인물 ]

- 황희석(希碩) : 요동정벌 때 이성계(李成桂)를 따라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조선개국공신 2등에 올랐다.

- 황현(鉉) : 세종 때 대사성을 지낸 조선 전기의 대표적 유학자이다.

- 황여일(汝一) : 임진왜란 때 권율의 휘하에서 공을 세우고 뒤에 진주사(陳奏使)의 서장관이 되어 명나라를 다녀와 기록한 '조천록(朝天錄)' 등의 저서가 있다.

- 윤석(允錫) : 영조 때의 실학자, 언어학자로서 그의 문집인 '이재유고'와 그가 저술한 '화음방언자의해(華音方言字義解)'는 오늘날 국어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인구] 124,072명이 있다.(1985년)

장수황씨(長水黃氏)

시조 황경은 신라 경순왕의 부마로 벼슬은 시중을 지냈다. 그후 10세손 황공유가 고려 명종 때에 전중감으로 이의방의 난이 있은 후로 장수로 낙향 하였고, 15세손 황감평이 후학을위한 덕망있는 학자 였다는 것 외에는 18세손 황석부 까지는 고증할 자료가 없다. 중시조 황석부는 황희의 증조부로 사후에 호조참의로 추증되었다. 그래서 후손들이 황석부를 1세 조상으로 하고 있다.

[ 대표적 인물 ]

- 황희(黃喜) : 조선시대의 4대 명재상의 한 사람으로 정승의 지위에 24년간, 그 중 영의정에 18년간 있으면서 농사의 개량과 예법의 개정, 서얼의 천역(賤役) 면제 등 치적을 쌓았으며, 소신이 굳으면서도 원만하고 청렴하여 청백리에 뽑히는 등 숱한 일화를 남겼다.

- 황치신(致身): 황희의 아들. 중추부판사 등을 역임하고 우의정에 올랐다.

- 황수신(守身): 황희의 아들. 우의정과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다.

- 황정욱(廷彧): 이조판서, 예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광국공신 1등에 책록되었으며, 시와 서예에도 뛰어났다. 저서로 '지천집(芝川集)'이 있다.

- 황경원(景源): 대제학을 비롯해 이조, 예조, 공조판서를 역임하였다.

- 황맹헌(孟獻): 황여헌(汝獻), 황효헌(孝獻) 3형제: 문장과 서예가 뛰어났다.

- 황윤길(允吉): 성조 때 일본에 다녀와 풍신수길[豊臣秀吉,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침략을 예고했다.

- 황엽(曄): 숙종 때의 학자로 의학뿐 아니라 지리에 정통하여 '여지도(輿地圖)'를 만들고 '지도연의(地圖衍義)'를 저술했다.

- 황승원(昇源) : 순조 때의 명신 , 한말의 야사(野史)를 엮었다.

- 황현(玹) : '매천야록(梅泉野錄)'의 저자이다.

[인구] 126,744명이 있다.(198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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