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는 나무라지 않는다
유영만 칼럼
<1>나무는 나무라지 않는다!
못 생긴 나무가 오래 산다는 말이 있다.
잘 생긴 나무는 목재이고 못 생긴 나무는 분재다. 목재로서의 가치는 곧은 나무다. 굽은 나무는 목재로서의 가치가 없다.
목수가 집을 짓기 위해 선택하는 나무는 잘 생긴 곧은 나무다. 그래서 목수가 목재를 선택하는 순간 목재로서의 나무는 생을 마감한다.
목재는 주로 비옥한 땅에 떨어진 씨앗이 별다른 고생 없이 자라서 된 나무다.
성장과정을 방해받지 않고 시련과 역경을 경험하지 않고 자라는 나무가 목재다.
이에 반해서 분재는 씨앗이 척박한 땅이나 바위틈처럼 악조건에서 성장하는 나무다.
분재는 자라는 과정에서 우여곡절을 경험하고 숱한 고난과 역경을 견디면서 자라는 나무다.
자라는 환경이 좋지 못해서 분재는 목재만큼 곧지 못하고 이리저리 휘어져 있고 굽어져 있다.
목재로의 가치는 없지만 분재는 보는 사람의 마음을 울렁거리게 할 정도로 나무의 희노애락(喜怒哀樂)을 느끼게 만든다.
나무는 씨앗이 떨어지는 곳이 곧 자신의 삶의 터전이다.
비옥한 땅에 떨어지든 척박한 땅에 떨어지든 일단 땅에 떨어진 씨앗은 최선을 다해 싹을 틔우고 줄기와 가지를 뻗어 꽃을 피우려고 노력한다.
그래야 열매가 맺히고 다시 종족보전을 할 수 있는 씨앗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나무는 어느 곳에 씨앗을 떨어뜨리든 거기서 죽을 때까지 운명을 탓하지 않고 최선의 노력을 경주한다.
나무는 꿈을 꾸지 않는다.
나무의 꿈은 열매를 맺고 씨앗을 뿌리는데 있지 않다.
그저 주어진 조건과 환경에서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아갈 뿐이다.
봄이면 꽃을 피우고, 여름이면 녹음을 만들며, 가을이면 불타는 단풍을 자랑하다 겨울이 되면 모든 것을 벗어 던지고 나목으로 혹한의 추위를 견뎌낸다.
그래도 다시 새 봄이 되면 희망의 싹을 틔운다. 나무는 절망 속에서 희망을 만들어낸다.
철학자 니체가 말하는 것처럼 나무는 운명을 거부하지도 않고 순응하지도 않는 운명애(Amor Fati)를 몸소 실천한다.
운명애는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는 것이다. 나무는 주어진 운명을 거부하지도 순응하지도 않으면서 자신이 살아갈 삶을 사랑하며 만들어가는 것이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없다.
먼저 자신의 탄생과 존재를 사랑하는 사람이 자유롭게 자기다움을 찾아 자기로서 살아가는 사람이 된다.
3억대 1의 경쟁률을 뚫고 태어난 나는 탄생 자체가 신비이며 경이다.
삶은 살지 말지를 결정하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살아가지 않으면 사라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그 운명을 사랑하는 만큼 내 삶도 사랑하게 된다.
삶의 목적은 자기다움을 찾아 자기로서 살아가는 데 있다.
자신이 아니라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불행한 사람이다.
그런데 나무는 자신을 위해서 꿈을 꾸진 않지만 더불어 숲을 만들기 위해서는 꿈을 꾼다.
나무는 다른 나무와 더불어 살아가는 숲을 꿈꾼다.
신영복 교수에 따르면 나무의 꿈은 명목(名木)이나 낙락장송이 아니라 더불어 숲이 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나무는 더불어 숲이 되기 위해 다른 나무와 더불어 이전과 다른 숲을 꿈꾼다.
숲에는 나무도 있고 온갖 생명체가 더불어 살아가는 생태공동체가 있다.
생태공동체로서의 숲은 다양한 생명체가 저마다의 존재이유를 갖고 경쟁하면서도 협동하고, 협동하면서도 경쟁하면서 살아가는 아름다운 공동체다.
숲에 사는 나무는 저마다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간다.
키가 큰 나무는 보다 많은 햇빛을 받으며 살아가지만 키가 작은 나무는 나무 사이로 들어오는 적은 햇빛으로도 자란다.
나무는 각자의 위치에서 살아가는 생존의 노하우를 터득하면서 살아간다.
산 정상에 있는 나무는 자세를 낮추고, 중턱에 있는 나무는 중용의 미덕을 지키며, 산 밑에 있는 나무는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자란다.
나무는 각자 주어진 위치에서 자기 본분을 다하며 살아간다.
산 정상에 서 있는 나무는 키가 너무 크면 어느 순간 몰아치는 비바람에 부러질 수 있음을 터득했으며, 중턱에 있는 나무는 비탈길에서 버티면서 살아가는 지혜를 온몸으로 깨달은 것이고, 산 밑에서 자라는 나무는 치열하게 자신의 키를 키우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음을 터득한 것이다.
어떤 위치에 있든 나무는 다른 나무와 일정한 간격을 유지한 채 자기 자리에서 조용하지만 치열한 사투를 벌이면서 위로 자란다.
나무의 키가 커질수록 나무는 뿌리도 함께 깊이 내린다.
아래로 뻗은 뿌리의 깊이가 위로 성장할 수 있는 높이를 좌우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이다.
나무는 어떤 상황에서도 나무라지 않는다.
나무는 남 탓을 절대로 하지 않는다.
비바람이 몰아치면 뿌리 채 흔들리지만 웬만한 비바람으로는 뿌리 채 뽑히지 않고 가지와 줄기만 흔들어댄다.
눈보라 몰아치는 한 겨울이면 세상의 모든 것이 얼어붙지만 나무는 얼지 않는다.
눈이 가지 위에 산더미처럼 쌓여도 가지는 부러지지만 줄기는 부러지지 않는다.
나무는 환경이 열악해지면 열악해지는 대로, 비바람이 몰아치면 몰아치는 대로, 눈보라가 휩쓸고 가면 휩쓸리는 대로 흔들리며 살아간다.
그러나 절대로 나무는 누군가를 나무라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삶을 하루하루 충실히 살아간다.
부러진 가지는 버리고 남은 가지로 꿋꿋하게 버티고 견뎌나간다.
정호승 시인은 ‘견딤이 쓰임’을 결정한다고 했다.
견딤의 크기가 쓰임의 크기를 결정하며, 견딤의 기간이 쓰임의 기간을 결정한다.
버티고 견디지만 좌절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온몸으로 승부수를 던진다.
나무는 가만히 서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온도와 기후변화를 감지하고, 민감하게 반응하지만 소리 내지 않는다.
나무는 침묵 속에서 자신을 관조하면서 고요 속에서 세상의 소란함을 희석시키며, 고독 속에서 앞날을 생각한다.
그렇지만 나무는 절대로 환경 탓을 하지 않고 모든 것을 제 탓으로 생각한다.
나무는 태어난 운명을 탓하지 않고 주어진 운명에 순응하면서도 매순간 새롭게 태어나기 위해, 고요하지만 치열한 전투를 벌이며 살아간다.
유영만 님의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