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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것들

우매한 정치와 경제 민주화

                                       우매한 정치와 경제 민주화

 

 

 

  세계 경제는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혼돈이 몇 년째 이어지고 있다. 2008년 9월 미국 투자은행 리먼 브라더스의 파산으로 촉발된 세계 금융 위기가 가까스로 극복되는가 싶더니 2010년 초 그리스에서 번지기 시작한 유럽 재정 위기가 덮치면서 세계 경제는 또다시 휘청거리고 있다. 우리의 최대 수출 시장인 중국의 2분기 성장률이 3년 만에 7%대로 떨어지고 미국 경제의 회복 기운이 미약한 가운데 일본은 여전히 장기 침체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등 다른 주요 경제권도 곤궁한 모습이다.

  
지난해 무역의존도가 97%에 육박한 한국으로서 세계 경제의 침체는 치명타가 아닐 수 없다. 게다가 부동산시장이 오랫동안 가라앉으면서 내수 경기마저 식어 버리자 일본식 부동산발(發) 장기 불황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솔솔 새어 나오고 있다. 한국은행은 이미 올해 성장 전망을 3%로 내렸으나 2%대 중후반을 예상하는 국내외 경기예측기관이 적지 않고 심지어 1.8%까지 낮춘 곳도 있다. 벌써부터 우리 경제가 저성장의 늪에 빠진 게 아니냐는 비관론이 제기되면서 저성장, 저물가의 디플레이션 공포마저 엄습하고 있다. 우리 경제가 몹시 급박한 상황에 처해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너나없이 힘을 합쳐도 시원치 않을 판에 돕기는커녕 되레 경제의 발목을 잡으려 드는 못된 집단이 있어 열심히 살려는 국민을 맥 빠지게 한다. 바로 정치권이다. 이번에는 개념과 실체조차 모호한 이른바 ‘경제 민주화’를 들고 나와 대중을 자극하고 있다. 연말의 대통령선거까지 다섯 달도 안 남은 절박한 상황이라는 점을 감안해도 나라 경제야 어찌 되든 표만 얻으면 그만이라는 그들의 단세포적 가치관이 너무도 실망스럽다. 그 좋은 ‘민주화’라는 단어가 지금처럼 걱정스러운 때가 또 있었나 싶다.

  
더욱 염려스러운 것은 정치권이 여론몰이에 경쟁적으로 나서고 있다는 점이다. 경제 민주화가 마치 시대정신이라도 되는 양 여야 가릴 것 없이 경제 민주화 법안을 잇따라 발의하며 서로 ‘경제 민주화의 맹주’를 자임하는 형국이다. 여야의 입장에 약간의 차이가 있기는 하나 경제 민주화는 결국 재벌 개혁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재벌들이 못된 짓을 많이 한 것은 사실이므로 개혁의 대상으로 삼는 것을 말릴 생각은 추호도 없다. 변칙적인 소유.지배구조, 독과점, 양극화, 불공정거래, 편법 상속, 일감 몰아주기 등 하나같이 우리 경제를 왜곡시킨 불경제(不經濟)의 대표적인 요소들을 껴안고 있는 게 우리네 재벌이다.

  
하지만 개혁의 주체가 영 미덥잖다. 도대체 우리 정치권이 누구보고 민주화하라고 윽박지르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경선 과정부터 편법과 비리가 판치고, 선거에서는 온갖 부정이 난무하며, 대형 의혹이 터졌다 하면 빠지는 법이 없고, 국익보다 당리당략을 앞세우기 일쑤인 정치인들에게 무슨 민주화를 기대한단 말인가. 공연히 상대적 박탈감을 부추겨 국민을 불편하게 하고 정치적 잇속이나 챙길 속셈이라면 표심 얻으려고 무슨 짓이든 마다하지 않는 ‘무서운 이기심’의 발로일 뿐이다. 세계 삼류 수준에 머물고 있는 정치가 세계 일류인 경제의 발목을 잡는 우스꽝스러운 상황이 또다시 연출될까 우려되는 이유다.

  
지금은 디지털 시대이고 세계화 시대라는 것도 염두에 둬야 한다. 예전처럼 우리끼리 지지고 볶고 하던 시절에는 ‘정의로운 교통정리’가 먹혀들 때도 있었고 그럴 필요도 있었다. 그러나 요즘은 한 지역의 상황이 순식간에 전 세계로 전파돼 가공할 영향력을 미치곤 한다. 유럽 재정 위기가 대표적인 예다. 규제도 과거와는 달라야 한다. 대기업을 내보낸다고 해서 중소기업이 살아나는 게 아니라 엉뚱하게 외국 기업만 좋은 일 시켜 주는 경우가 허다하다. 기업들은 밖에서도 외국 기업들과 생사를 건 혈투를 벌여야 한다. 잘못이 있다고 해서 재벌을 해체하거나 손발을 묶는다면 ‘국가 경제에 대한 자해’에 다름 아니다.

  
아직도 아날로그적이고 쇄국적인 처방만 고집해서는 곤란하다. 순환출자 금지, 재벌세 신설, 출자총액제한제도 부활, 금산 분리 강화 등 논의의 여지가 많은 사안들을 무턱대고 밀어붙이기보다는 좋은 일자리 창출과 국가 경쟁력 제고 같은 재벌의 순기능을 살리고 역기능은 차근차근 해소해 나가는 ‘당근과 채찍’이 위기를 극복하는 올바른 수순이다. 지금 같은 경제난 속에서 기업들 기(氣)를 살려 주지는 못할망정 꺾어 버린다면 매우 우매한 짓이다.

  
다만 여기서 분명히 해둘 게 하나 있다. 기업은 살리되 기업인의 못된 짓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회초리를 들어야 한다는 점이다. 거액을 사회에 환원한다고 해서 재벌 총수를 처벌하지 않고 봐주는 사례가 또다시 되풀이돼서는 안 된다. 재벌들도 변명만 늘어놓을 게 아니라 한결 높아진 국민정서에 걸맞은 재벌상(像)을 정립하려고 힘써야 한다.
  
지금은 정치권과 재벌의 각성과 분발이 함께 촉구되는 시점이다.

 

 

 

이도선

    (전) 연합뉴스 경제부장, 워싱턴특파원(지사장)
    (전) 연합뉴스 논설실장
    (현) 연합뉴스 동북아센터 상무이사
    (현) (사)선진사회만들기연대 편집위원, 운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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