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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것들

남한산성과 행궁

 

북문을 향해서

 

 

 

 

 

 

 

 

 

 

 

 

 

 

 

 

 

 

 

 

 

 

 

 

 

 

 

 

 

 

 

 

 

 

행궁 배치도

 

 

남한산성 내 행궁의 설립배경

 

임금이 선왕의 능행이나 휴양, 또는 전란으로 인하여 도성 밖으로 거둥하는 경우 임시로 거처하는 곳을 행궁(行宮)이라 한다. 행궁은 행재소(行在所)라고도 부르는데 능행차 등 임금이 이동 중에 단기로 사용하는 행궁은 노량행궁이나 시흥행궁, 과천행궁처럼 그 지방의 관청이나 부호의 집을 빌려 사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병치료와 같은 휴양이나 전쟁 또는 내란시 보장지(保障地)로서 사용되는 행궁은 수십일 또는 수개월 장기적으로 사용하게 되는데, 그에 따라서 서울의 궁궐 기능을 축소하여 수행할 수 있도록 새로 지어서 사용하였다. 휴양으로 사용되었던 행궁은 세종이 피부질환과 눈병을 고치기 위하여 찾은 온천으로 유명한 온양행궁과 초정행궁이 있고, 전란시 후방군이 지원 올 수 있을 때까지 피난할 수 있는 행궁은 강화행궁, 북한산성행궁 그리고 남한산성행궁이 있다.

인조2년(1624) 정월 반정이후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이괄이 난을 일으키자 인조는 도성을 떠나 공주까지 파천하기에 이르렀다. 난이 평정되자 조정내부에서 유사시 왕실의 피난처로 남한산성이 거론되고 그 해
4월 남한산성 수축공사가 시작된다.

남한산성행궁은 광주행궁(廣州行宮)으로 불리는데 『중정 남한지』나 『광주부읍지』에는 남한산성 수축과 동시에 건립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인조실록』3년 6월 23일 기사에는 이서의 계책에 따라 행궁을 남한산성에 건립하도록 하는 내용이 있어 성곽수축공사를 시작한지 1년 후인 1625년 6월 이후 공사를 시작하여 1626년에 완공한 것을 알 수 있다.

 


 

 

 

 

 

비록 성곽과 행궁의 착공 시기는 다르지만 준공년이 같고, 또한 준공 후 바로 현재 하남에 있던 광주부의
치소를 산성으로 옮기는 것을 볼 때 행궁의 조성이 장기적인 계획으로 산성 수축과 동시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고 있다.

1636년 병자호란이 발발하여 청군이 밀려오자 인조는 서울을 나와 이미 종묘사직의 신주와 봉림대군이 피해있는 강화도로 향하였으나 이미 청의 선봉군이 서울에 다다르자 세자와 백관을 대동하고 남한산성으로 향하였다. 10년 전 스스로 만들어놓은 행궁으로 들어가게 된 것이다. 이후 인조는 47일간 남한산성행궁에 머물며 12만의 청군에 항전하다가 믿었던 강화도가 함락되고, 봉림대군이 인질로 잡히자 삼전도로 출성하여
조약을 맺고 항복하였다.

이후에도 숙종, 영조, 정조, 철종, 고종 등이 여주의 영릉(英陵)이나 영릉(寧陵), 광주의 헌릉(獻陵)이나 인릉(仁陵) 능행길에 머물러 이용하였다. 특히 정조는 1779년 여주 능행시 5박6일 정도의 일정을 7박8일로 하여 그 중 4박5일을 남한산성행궁에서 보냈다. 이 때의 능행은 120주기를 맞은 효종의 능을 참배하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보장중지(保障重地)로서 산성의 상황을 점검하고 군사훈련을 참관하여 환난에 대비하려는 것이었다.

 

 

 

 

 

2. 남한산성 내 행궁은 왜 다른가?

남한산성행궁은 창건이후 병자호란을 거치며 중앙에서 관심의 증대로 행궁영역이 확장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최초의 모습으로는 영남대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남한산성도를 보면 남한산성행궁의 창건 당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目’자 형태로 담장을 배치하여 3개의 공간을 구성하였는데 이는 도성내 궁궐의 배치형태인 삼조(三朝)와 전조후침(前朝後寢)의 배치형태를 적용한 것이다. 여기서 삼조는 궐내각의 관청이 들어서는 외조(外朝)와 공식적인 정치공간인 치조(治朝), 침전이 있는 연조(燕朝)를 말하는데 행궁에 삼조의 원리가 도입된 것은 남한산성행궁이 처음이며, 추후 남한산성행궁을 기초 하여 북한산성행궁을 건립하게 된다.

초창기 행궁은 앞의 중앙에 3칸 대문을 두었고, 뒤로 중대문이 있으며, 그 안에 내행전과 외행전을 두었다. 다만 내행전 앞의 내삼문은 표현되어 있지 않다. 지도에서 특이한 것은 내행전을 상객사, 외행전을 하객사로 표현하고 있다. 이는 임금이 오실 때 거처하는 의미로 객사를 사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숙종대는 남한산성행궁 뒤편으로 재덕당(在德堂)과 좌전(左殿), 우실(右室)이 건립되었다. 당시 남한산성은 불의의 사태에 대비할 수 있는 배도(陪都)임에도 임금이 거할 수 있는 행궁만이 있고 국가의 정신적 지주인 종사의 위패를 모실 곳은 없었다. 따라서 임금의 파천과 함께 종묘와 사직의 신주를 이안하여 봉안 할 수 있는 장소가 별도로 필요하였다.

 

정조대에는 한남루를 건립하였으며 순조대에는 행궁주위로 광주유수부의 관청건물이 건립되었다. 행궁 북측 담 밖으로 완대정을 시작으로 내행전 옆으로 좌승당, 후원과 행궁 뒤편에 이위정, 이명정, 옥천정을 건립하였고 집무시설로 외행전 옆에 일장각을 건립하였다. 이 때에는 행궁기능보다는 광주부의 치소로서의 행정적인 기능이 강화되고, 주변으로 유수의 휴식공간을 위한 정자건물이 많아지게 된다. 이처럼 남한산성행궁은 능행차시 잠시 머무르는 행궁과는 다르게 전란시 장기적으로 항전할 수 있는 공간으로 계획되었다.

 

 

 

 

 

 

남한산성행궁의 복원의 의미

남한산성행궁은 조선중기 이후 한양 서울을 대신하는 배도지로, 현재의 서울 강남과 성남, 하남 등 너른고을을 다스리는 치소로, 서울의 동쪽을 방어하는 군사요충지로 중요성을 더하며 지속적으로 관리되어왔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이후 탄압과 방치 속에 행궁을 비롯한 산성내 문화유산들은 철저히 무너져갔다. 200여개의 문화재는 현재 10여개 정도 밖에 원형보존이 되어있지 않으며, 행궁도 상궐의 초석정도만 확인할 수 있었다. 더욱이 마을 역시 상업화의 물결 속에 거주지보다는 식당촌으로 변질되어 버린 것이 현실이다.


이에 행궁의 복원은 남한산성의 미래모습을 이끌어갈 중요한 한 점이 되었다. 행궁의 복원으로 남한산성이 가지고 있는 문화적 역량이 재조명되었으며, 마을 분위기도 이에 동참하는 방향으로 물길을 바꿀 수 있게
되었다. 1999년 당시 상궐의 초석만 남아있던 행궁터 주위로는 호텔 및 음식점들이 들어서 있어 행궁 앞 정비와 함께 이루어졌는데 정비지역 내 음식점의 이전은 주민들의 삶과 직렬로 연결되어있어 진행과정에서

여러 난관도 있었지만 대부분 주민들이 행궁복원의 취지를 이해하고 추진할 수 있었다.

1999년부터 발굴의 결과와 문헌기록 그리고 일제강점기 때 촬영한 남한산성의 옛 사진 등을 토대로 고증하여 추진하였던 남한산성행궁의 복원은 10여년이 지난 2010년 전체 윤곽이 드러난다. 물론 앞으로 단청 등
추가적으로 가다듬을 부분은 있지만 보장처로서 행궁의 위용을 느끼기에는 충분하다.

이제는 복원된 행궁을 바탕으로 남한산성의 덮여진 껍질을 벗겨낼 때이다. 수도권 가까운 등산지나 분위기
좋은 식당촌이 아닌 1400여년의 역사가 뒤덮인 공간으로 재탄생할 때가 왔다. 앞으로 행궁에서는 이를 위하여 각종 프로그램을 통해 진정한 가치를 홍보하고 전파할 것으로 기대된다.


 

 

 

 

 

 

 

 

 

 

 

남한산성의 행궁 복원공사가 완료되어 드디어 일반 관람이 시작되었다.

5월의 신록과 큰 소나무숲이 좋은 남한산성 성곽둘레길을 산책하고 새로 완공된 행궁을 관람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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