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룡의 해
송년회가 절정이니 또 한 해가 저무는 모양이다. 백토(白兎)의 해인 신묘년의 뒷모습 너머로 벌써 흑룡(黑龍)의 해인 임진년(壬辰年)이 고개를 내민 듯하다. '갑을병정…'의 10간과 '자축인묘…'의 12지로 따지는 해 이름은 음력이 기준이니, 내년 1월 23일에야 진정한 임진년에 접어든다. 그러나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양력으로 해가 바뀔 때 으레 60갑자 해 이름까지 함께 바꾸는 사회적 습관도 두터워졌다. 미리 앞당겨서 생각하는 조급증일 수도, 미래지향적 사고일 수도 있다. 흑룡의 해 또한 그런 야누스의 얼굴일 게다.
■ 임진의 임(壬)은 오행으로는 물 수(水), 계절로는 겨울 동(冬), 색으로는 검을 흑(黑), 오상(五常)으로는 지혜 지(智)에 해당한다. 당장 차갑고 암울한 기운부터 느껴질 만하지만, 역설에 능한 동양전통의 인식은 다르다. 가령 겨울은 만물의 생기가 사라진 계절이 아니라 생기를 깊이 갈무리해 조금씩 키워가는 계절이다. 나뭇가지의 겨울눈은 겨우내 물을 길어 올려 새봄의 움을 준비한다. 검은 색에 대한 인식도 비슷하다. 색의 소멸이 아니라 온갖 찬란한 색채의 씨앗을 한데 안은 무한 가능의 색이니, 으뜸 색으로 치고도 남는다.
■ 한국사에서 임진년은 전쟁이 많았다. 고구려의 낙랑 정벌(52년), 신라의 우산국 정벌(512년), 고려의 강화 천도(1232년)는 물론이고 바로 임진왜란(1592년)의 해이다. 임진의 천간(天干)인 임과 지지(地支)인 진의 흙 토(土)를 매개하는 쇠 금(金)의 기운 탓일까. 그런데 고려가 국립대학인 국자감을 세우고(992년) 보건복지 시설인 혜민국을 설치(1112년)했듯, 지혜와 배려의 해이기도 했다. 쇠는 병장기를 뜻하기도 하지만, 생산과 재화를 상징하기도 한다. 역사는 인간의 선택에 달린 것이지 하늘이 미리 정한 게 아닌 셈이다.
■ 새해는 '총칼 없는 전쟁'인 시장 경쟁과 정치적 쟁투가 예고돼 있다. 국내의 총선과 대선은 물론이고, 미국을 비롯한 주요 선진국에서도 정권의 향배를 가르는 선거가 예정돼 있다. 미국이나 유럽의 경제불안이 '2012년 대위기'로 번질 수 있고, 세계적 경기 후퇴에서 살아남기 위한 기업의 경쟁은 한결 달아오를 것이다. 이런 앞날을 헤쳐나가는 데 긴요한 것이 지혜다. '블랙 먼데이(Black Monday)'나 '블랙 스완(Black Swan)'등의 서양적 사고 대신 흑룡의 신비로운 지혜에 기대어 도리어 경제활력을 회복하는 한 해를 맞자.
황영식 논설위원 -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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