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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것들

사대문(四大門) 사소문(四小門) 내사산(內四山) 그리고 보신각(普信閣)>

 

북악산

 

 

사대문(四大門) 사소문(四小門) 내사산(內四山) 

 

 한양 도성 성곽(사적 제10호)은 기본적으로 내사산[內四山 : 북악산(백악 342m)·타락산(낙산 125m)·목멱산(남산 262m)·인왕산(338m)] 약 18.2.km를 성곽으로 연결하고 성곽에는 사방에 4개의 대문을 세우고, 그 사이사이에 4개의 소문을 세웠으며, 도성 가운데는 종루인 보신각을 세웠다.

 

  사대문은 (북대문)숙정문·(동대문)흥인지문·(남대문)숭례문·(서대문)돈의문(새문)인데

돈의문은 아직 복원되지 아니하였고, 사소문은 북소문인 창의문(자하문)·동소문인 혜화문(홍화문)·남소문인 광희문(수구문)·서소문인 소의문(소덕문)인데 소의문이 아직 복원되지 않고 있다.

 

  한양 도성의 궁궐·종묘·사직단은 태조 3년(1394) 12월에 공사를 시작하여 약 10개월 후인 태조 4년(1395) 9월에 완공하였다. 태조는 그 다음달 도성축조도감을 설치하고 정도전으로 하여금 공사를 지휘케 하여 사대문중 규모가 가장 큰 남대문을 태조 7년(1398)에 완공하므로서 모든 공사가 준공되었다.

 

 

<북소문 : 창의문(倡義門, 일명 자하문)>

  서울 성곽에는 동서남북에 사대문 그 사이에 사소문을 두었는데 창의문은 서대문과 북대문 사이의 북소문으로 ‘올바른 것을 들어나게 하다’는 뜻이 있다. 그러나 창의문을 북소문이라고 부른 일은 없었고 이곳 계곡의 이름을 빌려 자하문(紫霞門)이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태종 13년(1413)에는 풍수학자 최양선(崔揚善)이 “창의문과 숙정문은 경복궁의 양팔과 같으므로 길을 내어 지맥을 상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건의한 것을 받아들여 두 문을 닫고 소나무를 심어 통행을 금지시켰다고 한다.

  그러나 세종 4년(1422)에는 군인들의 출입 통로로 이용할 수 있게 했고, 광해군 9년(1617)에는 궁궐 보수 작업 때 석재를 운반하기 위하여 열어 주도록 하였다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당시에도 길 자체는 있었던 것 같다.

  이러한 창의문이 서울 성곽의 문루로서 제 구실을 하게 되는 것은 영조 17년(1741) 이곳을 수축할 때 였다. 당시 훈련대장 구성임(具星任)이 “창의문은 인조반정(1623) 때 의군이 진입한 곳이니 성문을 개수하면서 문루를 건축함이 좋을 것”이라고 건의한 것이 받아들여져 비로소 세워지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1956년 창의문 보수 공사 때 천장 부재에서 묵서로 된 기록으로 확인되었고, 지금 창의문에는 인조반정 때 공신들의 이름을 새겨놓은 현판이 걸려 있다.

  창의문의 형태는 전형적인 성곽 문루의 모습이지만 서울 사소문 중 유일하게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수백 년 동안 사람의 발길에 길들여진 작석이 윤기를 발하고 있고, 문루에서 바깥쪽으로 나와 있는 수구가 연잎모양으로 맵시 있게 조각되어 이 성문에 매력을 더하고 있다. 또한 성문의 월단(月團, 무지개 모양의 석문) 맨 위에는 봉황 한 쌍이 아름답게 새겨져 있는데, 속설에 의하면 이는 닭 모양을 새긴 것으로 창의문 밖 지형이 지네처럼 생겼으므로 지네의 천적인 닭을 새겨 넣은 것이라고 한다.

 

 

 

 

<북대문 : 숙정문(肅靖門)>

  숙정문은 서울 성곽의 북대문으로 ‘엄숙하게 다스린다’라는 뜻으로 이름 붙였다. 태조 5년(1396) 처음 서울 성곽을 쌓을 때는 지금 위치보다 약간 서쪽에 있었으나 연산군 10년(1504)에 성곽을 보수하면서 옮겨졌다고 한다.

  숙정문은 본래 사람들의 출입을 위해 지은 것이 아니라 서울 성곽 동서남북에 사대문을 격식을 갖추고, 비상시 사용할 목적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평소에는 굳게 닫아 두어 숙정문을 통과하는 큰 길은 형성되지 않았다. 다만 가뭄이 심할 때는 숙정문을 열고 남대문을 닫아 두었다고 하는데, 이는 태종 16년(1416)에 기우절목(祈雨節目, 기우제 시행규칙)을 만들면서 북쪽은 음(陰), 남쪽은 양(陽)이라는 음양의 원리를 반영한 것이었다.

  이처럼 숙정문 지역은 풍수지리학 상으로 음기가 강한 곳이었기 때문에 조선 후기의 학자 홍석모가 지은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는 “정월 대보름 전에 민가의 부녀자들이 세 번 숙정문에 가서 놀면 그해의 재액(災厄)을 면할 수 있다”라는 풍속이 전해진다. 그러나 이규경은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라는 저서에서 “숙정문을 열어놓으면 장안 여자들이 음란해 지므로 항시 문을 닫아 두게 했다”는 정반대의 속설을 전하고 있다.

  숙정문은 오랫동안 문루가 없이 월단만 남아 있었는데 1976년 북악산 일대 서울 성곽을 보수하면서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한 것이다.

 

 

 


 

<동소문 : 혜화문(惠化門)>

  혜화문(惠化門)은 도성(都城)의 4소문 중 동쪽에 위치한 문으로 조선(朝鮮) 태조(太祖) 5년(1396) 9월에 도성의 축성(築城)과 함께 지어졌다.

  본래(本來)의 이름은 홍화문(弘化門)이었는데 창경궁(昌慶宮)의 동문(東門)을 홍화문(弘化門)이라고 이름 지었기 때문에 중종(中宗) 6년(1511)에 혜화문(惠化門)으로 개칭(改稱)하였다. 그 후 건립 당시의 문루(門樓)가 없어져 영조(英祖) 20년(1744)에 문루를 건축(建築)하였고 북대문(北大門)인 숙정문(肅靖門)이 항상 닫혀 있어서 동소문(東小門)인 혜화문인 북대문(北大門)의 역할까지 맡았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빈번(頻繁)하게 통행(通行)을 했다.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인 1923년에 도시계획(都市計劃)이라는 명분아래 이 문루는 헐리었고 1939년에는 석문(石門)까지 없어지고 말았다. 1975년부터 1980년까지 6년간에 걸쳐 서울 도성(都城)을 복원(復元)하였는데 도성의 일부(一部)인 혜화문도 1992년부터 3년에 걸쳐 현 위치로 변경 복원되었다.

 

 

 


 

<동대문 : 흥인지문(興仁之門)>

  도성의 4대문 중에서 동쪽에 자리한 흥인지문은 다른 성문과는 달리 옹성(甕城, 곡성, 치성)이 부설되어 있는 보물 제1호이다. 태조 5년(1396) 창건된 이래 몇 차례 수축·개축이 있었으나 대체로 규모의 큰 변동은 없었다.

  음양오행설에 의하면 흥인지문의 어질 ‘인(仁)’자는 나무목(木)에 속하며, 또한 나무는 오방 가운데에서 동쪽에 해당하므로 ‘흥인’은 곧 동방을 뜻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흥인문’이라고 하지 않고 거기에 갈지(之)자를 첨가하여 ‘흥인지문’이라 한 까닭은 이 지대가 도성의 북·서·남쪽에 비해서 지대가 유난히 낮기 때문에 가라앉은 땅기운을 돋우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흥인지문’이라고 하기 시작한 것은 세조부터의 일이라고 한다.

 

 

 


 

<남소문 : 광희문(光熙門)>

  광희문(光熙門)은 속칭 수구문(水口門)이라고도 하며 조선(朝鮮) 태조(太祖) 5년(1396)에 건립한 서울 성곽의 8문중의 하나이다. 1915년경에 문루가 자연 붕괴된 이래 홍예(虹蜺)만 남아있었는데 1966년에는 문 북쪽의 성곽 일부를 철거하고 도로를 확장하였다. 그 후 1975년 서울 성곽을 다시 옛 모습대로 수축(修築)할 때 현재와 같이 복원하였다. 중국 사신은 숭례문을 통해 입성하였는데 반해 여진 사신은 혜화문으로, 왜의 사신은 광희문으로 입성하였다.

  광희문은 2호선 동대문운동장역 ③번 출구로 나오면 길 건너에 위치해 있다.

 


 

 

<남대문 : 숭례문(崇禮門)>

  조선시대 서울도성을 둘러싸고 있던 성곽의 정문으로 원래 이름은 숭례문이며, 남쪽에 있다고 해서 남대문이라고도 불렀는데 우리나라 국보 제1호이다. 현재 서울에 남아 있는 목조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태조 4년(1395)에 짓기 시작하여 태조 7년(1398)에 완성하였다. 지금 있는 건물은 세종 29년(1447)에 고쳐 지은 것인데 1961∼1963년 해체·수리 때 성종 10년(1479)에도 큰 공사가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문은 돌을 높이 쌓아 만든 석축 가운데에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을 두고, 그 위에 앞면 5칸·옆면 2칸 크기로 지은 누각형 2층 건물이다.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 형태를 하고 있는데, 이러한 지붕을 우진각지붕이라 한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위부분에 장식하여 짠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그 형태가 곡이 심하지 않고 짜임도 건실해 조선 전기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지봉유설』의 기록에는 ‘숭례문’이라고 쓴 현판을 양녕대군이 썼다고 한다. 지어진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있는 서울 성곽 중에서 제일 오래된 목조 건축물이다.

 

 

 

 

<서소문 : 소의문(昭義門, 소덕문(昭德門)>

  소덕문은 도성의 서남쪽 숭례문과 돈의문의 중간지점에 위치하였고 도성의 4소문 중의 하나로서 태조 5년(1396) 9월 다른 성문과 함께 건설되었다. 그러나 성종 3년(1472) 소의문(昭義門)이라고 개칭하였는데 그 이유는 성종이 예종의 왕비 장순왕후(章順王后)에게 ‘휘인소덕(徽仁昭德)’이라는 시호를 추존하였는데 이 시호와 소덕이라는 문 이름이 같으므로 이것을 피하기 위하여 소덕문을 소의문으로 개칭하였다. 소덕문도 태조 5년(1396) 건축 당시에는 다른 성문과 같이 문루가 있었으나 언제 없어졌는지 그 시기를 확실히 알 수 없으나 문루가 없었던 것을 영조 19년(1743)에 금위영에 명하여 동년 8월에 문루를 건축하였다. 도성내의 시체는 광희문과 소의문으로만 나갈 수 있었으므로 도성 내에서 서쪽으로 나가는 시체는 모두 이 문을 통하여 나갔다.

  500여 년을 내려오던 이 소의문은 일제 때인 1914년 도시 계획이라는 구실로 모조리 철거하였고 지금은 서소문동에 있는 중앙일보 호암아트홀 앞(시청 쪽) 주차장 축대위에 표석이 있어 그나마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서대문 : 돈의문(敦義門, 새문)>

  서울 성곽의 4대문 가운데 서쪽 큰 문으로 서대문(西大門)·새문·신문(新門)이라고도 한다. 서울 도성 안 지명 중 새문안이라는 지명이 있는데 새문안은 바로 이 돈의문 안쪽의 지명을 가르키는 말이다. 1396년(태조 5) 한양 도성(都城)의 제2차 공사가 끝나고 8문이 완성되던 때 처음 세워졌다. 1413년(태종 13) 폐쇄되고 그 대신 그 북쪽에 서전문(西箭門)을 새로 지어 출입케 하였다가, 1422년(세종 4) 다시 서전문을 헐고 돈의문을 수리하였다. 그 뒤 헐어진 것을 보수하여 1711년(숙종 37)에 다시 지었는데, 대략적인 모습은 돌 축대 한 가운데에 무지개문을 큼지막하게 내고 축대 위에는 단층 우진각지붕집의 초루(樓)를 세우고 둘레에 낮은 담을 설치하였다. 1915년 일제의 도시계획에 따른 도로확장 공사로 인해 철거되고 말았다. 지금은 강북삼성병원 정문 보영빌딩 앞 언덕에 표석이 있어 돈의문이 있었던 자리를 가늠해 볼 수 있다.

 

 

 

 


 
<중앙 : 보신각(普信閣)>

지정번호 :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10호

시 대 : 조선 태조 5년(1396)

소 재 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관철동 45-5

  이곳은 도성 안팎에 시간을 알리는 보신각종이 걸렸던 누각이 있던 터다. 태조 5년(1396) 지금의 인사동 입구에 종각을 짓고 파루(罷漏 : 오전 4시)에 33번, 인정(人定 : 오후 10시)에 28번 종을 쳐서 도성의 문을 여닫고 시각을 알렸다. 또 도성 안에 큰 화재가 나도 종을 쳐서 성안 주민에게 알렸다.

  태종 13년(1413)에 종루를 지금의 종로 네거리로 옮겼으며, 세종 22년(1440)에는 동서 5칸, 남북 4칸으로 고쳐 지어 위층에는 종을 달고 누각 아래로는 사람과 말이 다니게 하였다. 이 종각은 전란과 화재로 여러분 소실되고 다시 지었는데 고종 32년(1895)에 고종이 ‘보신각(普信閣)’이란 현판을 내려 그 후 보신각이라 부르고 있다. 이 때의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팔작지붕이었다.

  보신각 건물은 도로 보수와 전란에 의한 소실 등으로 조금씩 뒤로 옮겨 다시 지었는데 1979년 8월 15일 다시 뒤로 옮겨지면서 대지 2,810㎡로 확장하여, 정면 5칸 측면 4칸 연면적 476㎡의 2층 누각으로 다시 건립하고 위층에 새로 만든 종을 걸었다. 현재의 보신각 현판은 이승만 전 대통령의 글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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