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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운이야기

최중근 선생님의 국가유공자 추대

 

 

 훈장

 

 

 

 

 

 

 

 

 

                                         고   최중근 선생님(2006년 11월 28일 별세)

 

 

 

 

 

                                                     1974년 3학년 8반 담임선생님이셨던

                                                 최중근 선생님(달중이)과 함께 가을 소풍에서  

 

 

 

최근 최중근 선생님(달중이 선생님, 3-8반 담임선생님)의 아드님인 최00님이 제게 연락을 해 와서

고 최중근 선생님께서 2010년도에 국가유공자로 지정이 되셔서 4.19 국립묘지로 이장을 계획하고 있다고

반가운 소식을 전해왔습니다.

최중근 선생님께서는 4.19의거가 일어난 해에 연세대학교 학생회장을 하셨답니다.

다시 한 번 자랑스러운 최중근 선생님의 삼가 명복을 빕니다. 

 

 

 

(아래는 최중근 선생님의 공적)

 

수신 : 국가보훈처 공훈심사과 담당자

발신 : 최중근 (37-105-1002311)

(4.19 당시 연세대학교 이공대학 학생회장)

 

공적입증자료

 

본인은 1957년(57학번) 연세대학교 이공대학 수학과에 입학하여 1960년 연세대학교 이공대학(당시는 현 이공대학, 공과대학, 간호대학을 합하여 이공대학이라 칭함) 학생회장에 당선되어 전 학도호국단 총학생회 임원들과(유영철 총 위원장) 힘을 합하여 1960년 4월 19일 시대적 요청에 따라 전국 각대학교 학생대표들과 공동으로 일시에 거사할 것을 주도하였습니다.(연세춘추 207호 참조)

당시는 자유당 독재 정권이 장기집권을 목적으로 반민주적 처사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관권 동원, 특무대경찰, 반공청년단 등 수많은 깡패 테러 조직을 이용하여 야당의 정당한 정치활동을 각목과 쇠파이프로 짓밟으며 “3인조” 등을 조직하여 깡패공화국을 무색케하는 테러를 자행하며 60.3.15일 정부통령 선거를 치러 목적을 달성하려 하였습니다.

 

당시 농촌은 피폐하였으며 경제는 뒤떨어져 국민생활은 피폐하였음에도 기성세대는 무기력하였고 국가의 장래는 암울하였습니다. 이에 학생들은 사회의 유일한 양심세력이라는 자부심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민족만이 살아남는다”는 역사적 가르침에 따라 누구의 사주나 가르침 없이 스스로 분연히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에 연세대학교 학생대표등은 경찰의 눈을 피해 뒷산숲속이나 당시 “금남의집”인 논지당(여학생 회관)에서 조직적으로 거사준비를 모의하였으며 선언문, 플랭카드, 구호, 유인물 등을 준비하였으며, 재경 각 대학교 학생들은 방과 후 광화문 근처(현재 교보문고) “백조” 다방에서 매일 상호 접촉하며 일제히 거사하기로 합의하고 4월 19일 정오 12시를 시위 발신 시간으로 정하였습니다. 이는 기미면 3.1 운동이 정오를 기하여 일어났음을 본받은 것입니다.

본인은 이공대학 학생회장으로 당시 각 단과대학 학생회장들과 같이 학생처장이신 조우현 교수님의 연희동 자택으로 찾아가 4.19 시위계획을 보고하고 백낙준 총장께도 보고해 줄 것을 요청했으며 본인은 당시 이공대학 학장님이신 장기원 학장님(연희동 자택)에 방문하여 알려 드렸습니다.

4.19 당일 아침 06시 연세대학교는 총학생회 주도하에 각 단과 대학 회장 및 대표들이 교내 여학생 전용실인 “논지당”에 모여 결단 성명서에 모두 서명 날인하고 오전 학과 수업과 강당에서의 기도가 끝나는 정오에 연세대학생 전원이 강당앞 광장에 집합 출정선언식을 한후 교정을 출발했습니다.

8열종대로 행렬을 만들어 맨 앞에 흰까운을 입은 약 100명의 세브란스 의과대학생들을 앞세우고 (현 4.19도서관 현관사진전시실에 전시됨) “3.15 부정선거 다시하라” “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라” 라는 구호를 외치며 신촌-서대문(새문안로는 데모대가 점령하여)-서울역-시청앞-을지로 입구-안국동-광화문-효자동 쪽으로 행진하였습니다.

 

그날 오후부터 도처에서(중앙청쪽) 총기 발포가 시작되어 우리 앞에 있던 데모대가 쓰러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희생을 줄이기 위하여 학생들을 설득하여 출발한때와 같은 대열로 행진을 계속하여(도로변에 시민들이 물을 주었으며, 뒤늦게 중대생들이 소방차를 탈취 당시 시경 앞으로 질주할 때 총탄발사에 당하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학교 광장으로 돌아와 집결하고 3,000여 전교생을 맞이한 백낙준 총장, 최현배 부총장 등(당신 연설문 연세춘추 참조) 교수 전원은 마중 나와 격려의 말씀을 하였습니다.

 

4.19 직후 전국의 무정부 상태를 수습하기 위해 본 인등은 4.19 수습위원외에 참가하여 각 대학의 관할 경찰서(연세대학교는 서대문 경찰서)를 운영하여 방화, 파괴, 폭력 등 무질서한 군중을 설득하여 안정화에 노력했으며, 경찰서 청소, 무기고 경비를 하였습니다. 특히 당시 이기붕 집은 완전히 폐허상태였으며 본인 등 대학생 300여명은 매일 교대로 동원되어 서대문지역 치안 유지에 노력하였습니다. 그 후 연세대학교는 4월 25일 문과대학의 철학, 역사학, 영문학, 교육학 교수들이 주축이 되어 역사상 처음으로 서울의 교수단 시위를 주도하였으며 4월 16일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성명을 발표하였습니다.

그 후 1961년 2월 28일 연세대학교 이공대학 수학과를 졸업하고 1961년 5.16이 발생하였으며 1961년 7월 4일 군에 입대하여 30개월 군 복무이후 만기 제대 하였으며 배화여고 수학교사 4년 배재고등학교 수학교사 31년 근무후 1999년 8월 30일 교감으로 명예퇴직하였습니다.

2006년 8월 2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