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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예술 이야기

해인사 고불암의 산사음악회를 회고하며

2005년 여름휴가는 고향 산청에서 지냈다.

아버님과 아내 그리고 막내 용호와 함께 산청 집을 떠나서 2시간 여 달려

도착한 해인사 고불암...

웅장하고 아늑하게 자리잡은 고불암 경내의 잔디밭에 수많은 ROTC17기 동기생부부가

가득하다.

마침 빈 자리에 아내와 난 착석을 할 수 있었고 산사 음악회를 즐길 수 있었다.

 

시원하고 아름다운 고불암

아버님도 용호도 아내도 나도 모두 좋은 추억의 밤을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해마다 고향 산청을 찾을 땐 항상 어르신들을 모시고

합천 해인사 고불암을 찾았었고 올해도 어김없이 고불암에서 한여름 더위를 피할 수

있었다. 

 

매화산(일명, 천불산) 920미터 높이에 터를 잡은 고불암은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곳이 되었다.

 

그 곳에서 열렸던 산사음악회를 회고하여 본다. 

 

 

해인사 고불암 산사음악회

임종헌의 계명산 통신

 

임종헌 독자기자 leemsaa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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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8월 13일. ROTC 17기 동기회가 주최하는 '산사의 음악회'가 열리는 날이다. 음악회가 열리는 가야산 해인사 고불암(古佛庵)을 향해 먼 길을 떠난다. 충주에서 합천 가야산까지는 꽤 먼 거리다. 4,5시간을 달린 후에 기야산 해인사 입구에 도착했다. '伽倻山海印寺(가야산 해인사)'라고 쓴 현판이 걸려 있는 일주문이 반겨 준다.

 

일주문에서 잠시 내려 쉬어 가기로 한다. 가야산의 울창한 숲이 보기만 해도 시원하다. 해인사를 품고 있는 가야산(1430m)은 '해동의 십승지(海東之十勝地)' 또는 '삼남의 금강산(三南之金剛山)'이라고도 일컫는 명산이다. 가야산의 맞은 편에는 매화산이 산세도 좋게 솟아 있다. 해인사 앞으로 굽이굽이 흐르는 홍류동 계곡은 한국의 팔승지로 꼽히는 계곡이다. 신라의 대문장가 최치원도 홍류동 계곡의 절경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지금도 그가 지은 것으로 알려진 시 한 수가 바위에 새겨져 있다. 또 최치원이 은둔생활을 했다는 곳에는 '농산정'이라는 정자를 세워 놓았다.

산길을 한참 달려 매화산(梅花山) 기슭 고원지대에 오르자 고불암이 웅장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해는 이미 서녘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뉘엿뉘엿 서산으로 넘어가고 있다. 고불암은 경남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해인사 경내 마장마을 위쪽에 새로 건립된 사찰이다. 이 사찰이 세워지기까지는 학군 17기 동기생인 이건우 군의 역할이 매우 컸다. 경남 창원에서 기업을 경영하고 있는 그는 독실한 불교신자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온세상에 펼칠 수 있는 도량으로써 이 고불암을 세웠다고 한다.

가야산 국립공원내에 위치하고 있는 매화산은 기암괴석이 발달한 산중의 하나이다. 가야산에서 보면 마치 열쇠를 연상케 하는 바위가 멀리 보이는 데 그곳이 바로 매화산이다. 매화산(1010m)은 가야산 남쪽에 있는 산들중 최고라고 해서 일명 남산 제일봉이라고도 하며 천개의 불상이 능선을 뒤덮고 있는 모습과 같다고 해서 천불산이라고도 불린다. 멀리서 보면 열쇠를 닮아 열쇠바위,곰바위,남매바위 등 기암괴석들이 기묘한 봉우리를 형성하고 있어 아름다운 경치를 연출한다. 가야산의 명성에 가려 있으되 산세의 뛰어남이나 산행의 묘미는 결코 가야산에 뒤지지 않는다. 봄에는 진달래꽃, 여름에는 홍류동에서 이어지는 계곡과 푸른 숲.가을이면 암벽 사이로 붉게 물든 단풍이 또한 볼 만하고, 겨울이면 소나무 숲과 기암괴석이 어울린 설경이 매우 아름다운 곳이다. 동서로 길게 이어진 능선을 이루고 있는 기암괴석들이 마치 매화꽃이 활짝 핀 것과 같다고 해서 매화산이란 이름이 붙었다.

 

연못을 지나자 고불암 고불루(古佛樓)가 성루처럼 눈앞을 가로막고 서 있다. 고불루는 점판암을 깎아서 만든 기초바닥 위에 세운 목조건물에 기와를 얹었다. 목조와 석조 건축물이 잘 조화되어 중후한 아름다움이 돋보인다. 돌계단 양쪽 옆에는 점판암으로 만든 해태상이 절안으로 들어오는 모든 액을 쫓아버리기라도 하려는 듯 두 눈을 부릅뜨고 있다.

 

고불루에 올라서자 고불암 대웅보전(大雄寶殿)이 아늑한 산자락의 품에 앉아 있다. 토요일이라서 그런지 예불을 드리는 사람들이 꽤나 많다. 대웅보전에는 고려 23대 고종시대 때 제작(1215년)되었다고 알려진 관음청동좌불(觀音靑銅坐佛)이 안치되어 있다.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오른쪽으로 주지스님의 사무실이자 접견실로 사용되는 육화당(六和堂), 왼쪽으로 스님들의 요사채인 벽안당(碧眼堂)이 사이좋게 마주보고 있다. 고불암은 해발 920m에 세워진 암자로서 해인사 말사 중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암자다. 고불암은 말만 암자이지 거의 대가람 수준이다.

 

저녁 8시. 육화당 앞마당에 설치된 야외무대에 조명이 켜지고..... 이진우 군의 사회로 음악회는 시작되었다. 먼저 고불암 주지스님이 축사로써 음악회를 축하해 주었고..... 유협 총동기회장(SBS 아나운서 실장)의 인사말에 이어 초청가수가 소개된다. 깊은 산속 산사에서 열린 음악회에는 처음으로 참석한지라 약간 흥분도 된다.

 

육화당 앞마당은 음악회에 참석한 사람들로 꽉 들어찼다. 의자가 모자라서 많은 사람들이 뒷편에서 서있어야만 할 정도다. 사회를 맡은 이진우 군의 씩씩하면서도 재치있는 입담으로 음악회의 흥은 점점 고조되어 간다.

육화당의 육화라는 말은 육화경(六和敬)에서 온 것이다. 육화경 중에서 신화경(身和敬)은 수도하는 사람들이 몸으로 서로 기쁘게 하는 것을 말한다. 사람은 누구나 다 불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부처를 대하듯 서로 공경하고 화목하라는 뜻이다. 구화경(口和敬)은 말로써 서로를 기쁘게 하라는 뜻이고, 의화경(意和敬)은 마음으로 화합하라는 뜻이며, 계화경(戒和敬)은 율법을 서로 지키라는 뜻이다. 견화경(見和敬)은 성스런 지견으로 화합하라는 뜻이고, 이화경(利和敬)은 이익을 함께 나누라는 뜻이다. 이 건물의 이름에는 이런 깊은 뜻이 있는 것이다. 음악회를 통해서 서로 화합하고 화목한 시간을 가지는 것이니 바로 육화를 실천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랴!

 
 무대는 먼저 '4월과 5월'의 김지민이 열었다. 긴 머리에 턱수염을 기른 모습의 김지민이 기타반주에 맞춰서 너무나 귀에 익은 '장미'를 부르자 우뢰와 같은 박수가 쏟아진다. 은은한 노래소리가 고요한 산사의 밤하늘로 울려 퍼진다. 유명한 노래라서 그런지 따라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 '장미'는 뭐니뭐니해도 4월과 5월의 대표곡이라고 할 수 있는 노래다.

최초의 순수 우리말 듀오였던 4월과 5월..... 1970년대는 트윈폴리오를 비롯한 번안곡 위주의 포크 듀오 전성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남성 포크 듀오 ‘4월과 5월’만은 창작곡으로 포크 열풍을 주도했다. 리더는 중앙대 작곡과 출신 백순진이었다. 70년대 젊은이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던 ‘화’, ‘바다의 여인’, ‘등불’, ‘옛사랑’, ‘겨울 바람’, ‘님의 노러 등 히트 송 뿐만 아니라 그의 실험적인 순수 창작 포크 실험은 그 의미가 대단히 컸다.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백순진은 잊혀진 존재가 되었지만..... 그는 성전다방에서 노래 아르바이트를 했던 서울대생 이수만을 만난다. 성대가 약했던 그는 노래 잘하는 파트너가 필요했는데 그 적격자가 바로 이수만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어감도 좋고 가요계에 새 바람을 불어 넣자는 뜻으로 만물이 소생하는 계절인 '4월과 5월'로 듀오 이름을 정했다. 지금은 멤버들이 모두 바뀌어 이지민이 4월과 5월을 지키고 있다.

 

이지민의 다음 노래가 시작되자 가요평론가 이백천이 무대로 나와 손장단으로 흥을 돋운다. 머리에 반백이 성성한 노인이지만 순수한 동심을 간직한 사람이다. 이백천 그는 1950년대 말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한국 가요의 산증인이자 일세를 풍미한 포크음악의 이론적 스승이었다. 그래서 가수 조영남은 그에게 '통기타 군단의 담임선생님'이란 별명을 붙여 준 바 있다.

이백천은 오늘 노래자랑 대회에서 심사를 맡았다. 나와 아내도 노래자랑 대회에 참가해서 듀엣으로 '사랑해'와 '송학사' 두 곡을 불렀는데 결과는 꼴찌였다. 그러나 이백천의 재치있는 심사평으로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다음 차례는 테너 김현동이다. 그는 이탈리아의 유명한 노래 '오 솔레미오'를 들려 주었다. 성량이 풍부하면서도 목소리를 자유자재로 조절할 수 있는 탁월한 능력을 지닌 가수다. 산사에서 듣는 테너 가수의 '오 솔레미오'는 정말 환상적인 것이었다. 벽안당 지붕 위에 걸린 반달도 귀 기울여 노래를 듣는 듯 하다. 김현동은 이지민과 화음을 맞춰 노래 한곡을 더 불러 주었다.

'오페라면 오페라 뮤지컬이면 뮤지컬, 대중과 호흡하는 성악가로 활동하고 싶다.'는 테너 김현동. 그가 지난 해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공연된 푸치니의 오페라 '나비부인'에서 핑커톤 역을 맡으면서 했던말이다. 또한 그는 올해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된 푸치니의 오페라 '투란도트'의 퐁 역에 오디션을 거쳐 캐스팅되었다. 핑, 퐁, 팡 세 배역을 통틀어서 한국인 출연자는 그가 유일한 사람이다. 그만큼 실력이 있다는 말이다.

김현동은 경희대 음대와 이탈리아 오지모·페르골레지 음악원, 밀라노 시립음악원 전문연주자 과정을 마쳤다. 그의 맑고 깨끗한 음색은 만토바 공작(리골레토) 네모리노(사랑의 묘약) 배역에 잘 어울린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현대 창작 오페라 무대에도 많이 서 본 경험이 있다. 또한 이탈리아 마르티나 프랑카 축제 등에서 갈리니의 ‘어떤 평범한 하루’, 바일의 ‘서푼짜리 오페라’ 등에 출연해서 노래와 연기실력을 인정받은 바 있다. 김현동은 매우 감미롭고 서정적인 음색을 들려주는가 하면 강렬하고 힘이 넘치는 스핀토 테너의 기량도 발휘할 수 있는 뛰어난 가수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무대에 오른 사람은 가수 이동원. 노래하는 음유시인 이동원..... 그가 정지용의 시를 노래로 만든 '향수'를 부르기 시작하자 청중들로부터 많은 박수가 터져 나온다. 이동원은 서울대 박인수 교수와 함께 '향수'를 들고 나와 유명해진 가수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음

질화로 재가 식어지면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선 자라난 내 마음(내 마음) 파란 하늘빛이 그리워(빛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러 풀섶 이슬에 함초롬 휘적시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우~

하늘에는 성근 별 알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거리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꿈엔들) 꿈엔들(꿈엔들) 잊힐리야-'향수'(정지용)


이동원은 이렇게 말한다.

'노래는 사람들의 감정을 표현하고 전달해주는 가장 원시적인 방법이라고 그러더군요. 슬픔과 기쁨..... 그리고 함께 부르면서 하나가 될 수 있는 매개체가 될 수 있다고 봅니다.'라고.....

노래에 대한 이동원의 철학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렇다. 사람들의 감정을 표현하고 전달해 줄 수 있는 수단 중에서 노래보다 더 좋은 것이 있을까? 또한 노래는 모두가 함께 부르면서 하나가 될 수 있는 훌륭한 매개체가 될 수 있다. 지금 이 자리 고불암 산사음악회에 참석한 사람들 모두는 노래를 통해서 한마음 한뜻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동원의 노래를 마지막으로 산사의 음악회는 막을 내렸다. 좋은 노래에 좋은 사람들..... 깊은 산속의 산사..... 구름 한점 없는 맑은 하늘에 뜬 반달..... 어디선가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 음악회에 참석한 사람들 모두 평생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될 것이다. 산사의 고요한 밤은 그렇게 깊어가고 있었다.

 

이튿날 아침 해인사를 보러 갔다. 해인사 경내는 수많은 사람들로 붐빈다. 몇 년만에 다시 보는 해인사던가..... 대웅전에 해당하는 대적광전 앞에는 유형문화재 254호인 3층 석탑과 석등이 세워져 있다.

해인사는 의상대사의 제자인 순응과 이정화상이 신라 제 40대 애장왕(서기 802년) 때 창건한 절이다.'해인(海印)'이라는 이름은 화엄경의 '海印三昧'에서 따온 것으로, '우주의 실상이 그대로 물(海)속에 비치는(印) 경지'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해인사는 1995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팔만대장경판전으로도 유명하다. 그래서 해인사는 불보사찰인 통도사, 승보사찰인 송광사와 더불어 법보사찰로써 한국의 삼대 사찰로 꼽힌다. 우리나라 화엄종의 근본 도량이기도 한 사찰이다.

신라시대에 화엄십찰의 하나로 세워진 해인사는 희랑대사를 위시하여 균여, 의천, 성철과 같은 빼어난 학승들을 배출하였다. 해인사가 번성을 누리기 시작한 것은 고려 태조 왕건 때부터다. 왕건은 당시의 주지 희랑이 후백제의 견훤을 뿌리치고 도와준 데 대한 보답으로 이 절을 고려의 국찰로 삼았다. 그 역사를 증명하듯 해인사에는 팔만대장경판본을 비롯해 국보급 보물 등 70여 점의 문화재가 남아 있다. 이곳에 있는 팔만대장경판본은 원래 강화도에 있었다. 그런데 왜적의 노략질이 심해지자 서울의 지천사로 옮겼다가 조선 태조 이성계가 지금의 해인사 장경각으로 옮기게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