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비즈이야기

부동산이 왕도는 아니다 - 건축 토목도 경기부양의 최선책은 아니다

오래전 이야기다. 2004년 한여름, 평소 골프연습장에서 알게 된 박 노인이 갑자기 나를 찾아왔다. 언젠가 휴게실에서 경제에 관한 이야기가 화제에 올랐을 때 가벼운 설전을 벌인 것을 계기로 특별한 인연을 맺게 된 분이었다. 그날따라 그의 분위기는 굉장히 어두웠다. 한참을 망설이던 그는 다음과 같은 사연을 털어놨다.

아들이 다니던 회사를 갑자기 그만뒀다. 다른 직장을 열심히 찾는 것 같았으나 여의치 않았다. 1년 이상 직장을 구하지 못하면서 아들 부부의 싸움이 잦아졌고, 보다 못한 그가 나섰다. 마침 제법 괜찮아 보이는 호텔이 비교적 싼 값에 매물로 나왔기에, 평생 모은 돈을 거의 쏟아 부어 은행 대출금 40억 원을 인수하는 조건으로 총 70억 원에 매입했다. 첫 1년 동안은 순수익이 5억 원이 넘었으므로 곧 은행 빚을 갚고 큰돈을 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2년도 지나기 전에 수입은 점점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은행 이자를 지불하기도 빡빡할 지경에 이르렀다. 게다가 근처에 새로운 호텔이 생겨 영업을 시작하면서 그의 호텔에는 빈 방이 늘어났다. 그때까지만 해도 현상유지라도 할 수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아들 부부가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서 직접 나서는 등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면서 위안을 삼았다. 그러나 곧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떨어졌다. 은행으로부터 대출금 중 20억 원을 당장 갚으라는 통보가 날아온 것이다. 호텔 수입이 줄었고, 그에 따라 자산가치가 30억 원으로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박 노인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하소연했다. 답은 간단했다. 나는 임자가 나서는 대로 당장 호텔을 팔라고 조언했다. 그것이 가장 손해를 줄이는 길이라고 몇 차례 강조했다. 돌아서는 그의 표정에는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대출금을 갚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니는 듯했다. 돈을 빌리러 여기저기 찾아다녔고, 소유 중인 부동산을 내놓기도 했다. 하지만 20억 원은 한두 달 안에 마련하기에는 너무 큰돈이었다. 결국 그는 호텔을 팔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때라도 호텔을 판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 호텔을 인수한 사람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은행 빚을 상환하라는 통보를 받았고, 손해를 감수하면서 다시 팔아야 했으니.


그해 가을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제법 큰 음식점을 경영하던 최 사장이 박 노인의 소개로 나를 찾아왔다. 단짝 친구처럼 지내는 박 노인에게 자신의 사정을 이야기했더니 나에게 자문을 구해보라고 하더란다. 그의 사연 역시 안타깝기는 마찬가지였다. 
온갖 고생을 다한 끝에 평생 모았던 돈을 쏟아 도로변에 5층짜리 건물을 하나 샀다. 1층은 전자제품 대리점에게 세를 주고, 2층에는 자신의 주업인 식당을 개업했다. 3층부터 5층까지는 임대 사무실이었다. 중심가에서는 좀 떨어져 있었지만 임대료 수입이 제법 짭짤했다. 머지않아 큰 부자가 될 것 같았다.

그런데 전자제품 대리점이 인근에 지은 새 건물로 이사를 가면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임차하겠다는 사람이 나서지 않아 1층을 상당 기간 비워둬야 했던 것이다. 그러자 식당의 수입도 예전 같지 않았다. 임대 사무실들도 어느 사이엔가 하나 둘 비기 시작했다. 그제야 비로소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채고 건물을 내놓았으나 매입 가격보다 훨씬 더 싼 가격이 아니면 팔릴 것 같지 않았다. 그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이번에도 역시 대답은 간단했다. 나는 팔리기만 한다면 손해를 보더라도 당장 팔라고 조언했다. 그러나 그는 수긍하지 않았다. 아파트는 물론이고 땅값까지 들썩이는 등 부동산 투기바람이 본격적으로 불기 시작하던 때였기 때문이다.


그는 살아남기 위해 치열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동안 남의 돈이라고는 한 푼도 빌려 쓰지 않던 그가 은행에서 거액을 대출받아 1층을 주차장으로 개조하고, 2층 식당의 인테리어를 새롭게 바꿨다. 다행히 식당 영업이 호전되면서 3층까지 넓힐 수 있었다. 4~5층 사무실도 대대적으로 개조하고 임대료를 낮추었더니 빈 사무실도 줄어들었다.

부동산 투기바람이 그의 노력을 보상해줄 것 같았다. 안타깝게도 이런 바람은 오래가지 못했다. 투기바람이 잦아들면서 주변의 아파트는 물론, 상가 건물의 가격까지 떨어지기 시작했다. 인근에 큰 건물들이 하나 둘 새로 들어서자 최 사장의 불안감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결국 그는 마음고생만 실컷 한 뒤에 건물을 매입 가격에 내놓고 말았다. 은행 대출을 안고 사는 조건이어선지 매매는 뜻밖에 금방 이루어졌다. 훗날 우연히 길에서 만났을 때 그는 아쉽지만 후회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어쩌면 지금쯤은 천만다행이었다고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부동산 경기는 당시보다 훨씬 더 침체되었으니까.


박 노인이나 최 사장은 어쩌다 그 같은 일들을 겪게 되었을까? 그에 대한 답 역시 간단하다. 통계를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기초적인 통계만 살폈더라도 박 노인은 호텔을 인수하지 않았을 것이고, 최 사장 역시 그처럼 높은 가격에 건물을 매입하지 않았을 것이다. 평생 번 돈을 투자하면서 기초적인 통계조차 확인하지 않았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통계를 살펴보면 그들은 실패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1997년부터 2003년까지 6년 사이에 제조업의 설비투자 대출금은 1.5배 증가했다. 도소매업과 운수창고업은 각각 2.3배와 2.6배 증가했으며, 최고의 호황을 누렸다던 금융보험업도 2.4배 증가하는 데 그쳤다. 그런데 숙박·음식업의 설비투자에 대한 대출금 증가배율은 11배가 넘었다. 부동산 임대업의 설비투자 대출금 증가배율은 무려 18배에 가까웠다. 이 표만 보더라도 숙박·음식업과 부동산 임대업이 얼마나 크게 증가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너도나도 음식점을 개업하여 대박을 터뜨리는 꿈을 꾸었고, 러브호텔 등 숙박업에 진출하여 큰 부자가 되기를 기대했으며, 부동산 임대업으로 평생을 편안하게 살려고 했던 것이다.


공급이 증가하면 가격은 떨어지기 마련이다. 시설투자가 갑작스럽게 증가하자 숙박업과 식당업은 물론, 부동산 임대업까지 극심한 불황에 시달리게 되었다. 불과 몇 년 전에 부동산 투기바람이 불면서 너도나도 오피스텔이나 아파트단지 상가에 투자했다가 많은 사람들이 원금도 건지지 못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상가와 사무실이 공급과잉이었던 셈이다. 만약 이런 간단한 통계만 확인했더라도 손실을 입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그렇다면 숙박·음식업과 부동산 임대업의 대출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이유는 무엇일까? 당시에 경기부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서비스업을 살려야 한다는 주장이 강력하게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선진국으로 갈수록 서비스업의 비중이 높다는 사실이 이러한 주장에 호소력을 더했다. 실제로 선진국의 서비스업 비중은 70퍼센트에 육박하며, 미국의 경우는 거의 80퍼센트에 이른다. 우리나라의 서비스업 비중 역시 해가 갈수록 커지고 있다. 1980년대까지 40퍼센트대에 불과했으나, 1992년에는 50퍼센트를 넘어섰고, 최근에는 거의 60퍼센트 대까지 상승했다. 게다가 다른 산업에 비해 고용 창출 효과가 상대적으로 크다는 이유로 정부는 서비스업 육성에 온갖 지원을 해주었다.


그러나 서비스업의 비중을 국가가 인위적으로 높인 것은 결코 잘한 일이 아니었다. 서비스업의 증가속도가 지나치게 빨라지면, 제조업이 위축되고 그에 따라 무역수지가 악화되기 때문이다. 국제수지가 악화되면 그만큼 성장잠재력은 떨어지고, 성장잠재력이 떨어지면 성장률이 낮더라도 경기과열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즉, 물가불안과 국제수지 악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오히려 국제수지 악화와 그에 따른 외환보유고 고갈로 외환위기를 겪었던 우리나라로서는 서비스업의 비중이 지나치게 빠른 속도로 커지는 것을 억제하는 것이 더 바람직한 정책이었다. 실제로도 서비스업 비중의 증가속도가 낮은 나라일수록 국제수지는 흑자이며, 성장잠재력도 그만큼 크다. 해미시 맥레이Hammish McRae의 《2020년 어떤 지역 어떤 나라가 어떻게 되나》에 나오는 다음 구절은 이 사실을 여실히 증명한다.


1980년대 말 공업의 비중이 GNP의 29.2퍼센트에 불과했던 미국은 탈산업화의 과정을 가장 빠르게 진행한 나라다. 영국에서는 공업의 비중이 30퍼센트였고, 프랑스는 28.7퍼센트였다. 그러나 탈산업화가 느렸던 독일과 일본의 공업 비중은 각각 38.7퍼센트와 41.8퍼센트였다. 이로 인해 독일과 일본이 일반적으로 보다 성공적으로 간주되고 있다. 특히 1980년대 내내(독일의 경우는 통일 이전까지) 거액의 국제수지 흑자를 기록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1


물론 1990년대 이후에는 선진국 중에서 일본과 독일의 경제성적이 가장 부진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이것은 경제정책의 실패에 그 원인이 있었다. 우선, 독일의 경우는 통일 후 사회적 일자리 창출을 통해 실업률을 낮추려 했던 정책이 결정적으로 경기부진을 불렀다고 할 수 있다(이 문제는 뒤에 다시 다룬다). 일본의 경우는 1980년대 말 주식시장과 부동산시장의 거품을 방치했다가, 그 거품이 꺼지면서 경기부진을 겪어야 했고, 이것을 탈피하기 위해 토목사업 중심의 경기부양정책을 선택한 것이 경기부진을 더욱 장기화시켰다고 봐야 한다. 토목사업 중심의 경기부양정책은 한계생산성이 매우 낮은 편이고, 이에 따라 소득이 줄어드는 압력을 받기 때문이다. 또한 국제수지 흑자가 지나치게 누적되자 국내 자본의 해외투자를 적극적으로 유도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것도 경기부진을 장기화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국내 자본의 해외투자는 국내 소득의 해외 이전을 의미하고, 이것은 내수 부족 사태를 불러오기 마련이다.


<본 칼럼은 최용석 소장의 “통계를 알면 돈이 보인다”내용의 일부를 발췌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