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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운이야기

살아 온 이야기 - 아버지의 변혁

어릴 적엔

어른들을 가만히 곁에서 보노라면

내가 알지 못하고 내가 갖고 있지 않는 그 무엇이 어른들에게는 틀림없이 있다고 느껴졌다.

어른들에게서는

무언지 모르는 자신감과 지혜로움, 강한 정신력, 책임감, 추진력과 그리고 삶의 의지를 느낄 수 있었다.

특히 아버지에게서는 더욱 큰 힘을 느끼면서 자라왔다.

 

특히 우리네 부모님께선

당신들의 개인적인 욕심은 하나도 없는 것 같았고

오직 자식들과 식구들을 먹이고 입히고 배우고 인간답게 살아 가도록 하는 것에

막중한 사명감과 책임감을 가지고 세상에 나오신 분들처럼

묵묵히 가야 할 길로만 외길 인생을 살아오신 것으로 알고 있다.

 

경남 산청이라는 고립된 작은 고을하고도 부리마을,

시골 촌구석에서 태어나서 줄곧 촌에서 살아오신 부모님은

35세라는 적은 나이에 혁신적인 삶의 변화를 시도하셨다.

아무 연고도 빽줄도 비빌언덕도 없었던 시절에 눈 감으면 코 베어 간다는 살벌한 삶의 격전지 

서울로 철부지 어린 것들을 데리고 과감하게 상경길에 오르셨다.

물론 내가 모르는 가운데 많은 생각을 하셨을테고 나름대로 정보도 수집하셨을 거고

서울에 가면 무엇을 해서 밥을 먹고 아이들을 교육시키고 부모님 봉양을 해야 하는 가에

대한 구상이 있었으리라 짐작은 해 보지만 과연 그러하셨는지는 잘 모른다.

그 당시 새로운 세상에 최초로 도전하시는 부모님의 심정은

얼마나 불안하시고 불투명 하였을까?

자식을 나으면, 특히 아들의 교육을 위해서 서울로 보내라는 옛 말을

깊이 헤아리시고 모험을 하신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을 해 본다.

  

회고해 보면 서울 성북구 송천동이라는 곳에

집을 얻어서 쌀장사를 시작하셨다.

경찰공무원이셨던 아버지와 농사를 지으셨던 어머니께서는

난생 처음 쌀 장사라는 비즈니스에 발을 들여 놓으셨다.

쌀을 값싸게 구입하여 적당한 이익을 붙인 가격으로 동네 주부들에게 팔아서

생활을 해 나가는 생필품 비즈니스의 시동을 거신 셈이다. 이때가 1962년이다.

 

내 기억으로는 1년 정도 쌀가게를 하시다가 수익성 측면에서 만족하지 못하시고

정리를 하신 후 미아리 돌산 올라 가는 중턱에 작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살던 동네로

이사를 하여(성동이네 집) 그 곳에서 과자가게(지금으로 말하면 구멍가게)를 새로 열어 놓고

제 2차 비즈니스(장사)를 시작하셨다. 아이템은 쌀과 잡곡에서 다양한 과자 등의

먹거리와 군것질 거리로 바뀐 것이다.

아버지는 방산시장에 자전를 타고 가셔서 도매상으로부터 팔 물건을 떼어다가

가게에 진열하여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파셨다.

아버님이 가게에 계실 때는 어머니는 큰 박스에 팔 물건을 담아서 머리에 이고

이곳 저곳 작은 가게로 가셔서 이문을 조금 붙이시고 팔다가 돌아오셨다.

마침 큰 누나가 가게도 보고 어린 우리 동생들을 보살피고 하였기에 두 분이 좀 더

생산적인 일에 매달릴 수가 있었다.

 

아버지가 발품을 파셔서 멀리 방산시장까지 가셔서 

도매상으로부터 값싸게 물건들을 구입한지라 소매가격으로 팔면 이익이 크게 남았던 것 같다.

그래서 이익을 조금 적게 보더라도 많이 팔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신 것 같고 그 결과,

주변에 아주머니 아저씨들에게 중간 보부상역을 맡겨서 그들에게 물건을 주어서

하루 종일 이곳 저곳 구멍가게에 팔아서 돌아오면 그 이익금의 몇 %를 떼어주는 식으로

중개상을 확대하여 갔다.(박리다매)

이런 방식으로 판매가 확대되자,

길음동으로 집을 옮기고 방과 창고를 이용해서 과자 재고 창고로 활용을 하였다.

이 때는 소매는 하지 않으셨다. 오로지 중상(보부상을 그렇게 불렀다.) 10명 정도를

거느리고 매일 물건을 대 주고 저녁에 남은 물건과 회수된 판매대금을 거두어 들이셨다.

 

그러면서도 아버지 어머니는 짜투리 시간을 이용해서 집안에 닭장을 여러개 손수 만들어

놓으시고 병아리를 사다가 키워서 어미닭을 만드셨고 이들이 다 자라면 길음시장에 내어다 파셨다.

즉 부업으로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동물사육을 실현하신 셈이다.

집안에 들어가면 영락없는 양계장 분위기고 집안에서는 양계장 냄새가 났다.

그 때는 길음동 주택가에서도 닭을 수백마리 키우더라도 누가 뭐라 하거나

환경오염을 단속하거나 하지 않은 시절이었다.

사료가 흔치 않고 비싸서 수백 마리의 닭에게 모이를 넉넉하게 주려면

자전거를 끌고 길음시장으로 나가셔서 장이 거의 끝날 무렵에 배추잎파리와

생선내장 대가리 꼬리 등을 공짜로 얻어서 자전거에 싣고 오셨다.

배추 잎은 작두와 큰 칼로 쫑쫑 썰어 놓고

생선내장과 머리 등은 큰 다라에 넣고 물을 부어 푹 삶는다.

그리고 집에서 식사 후 나오는 잔반(밥찌거기, 반찬 생선 등)을 모두 한데 붓고

배추잎을 넣고 사료를 좀 넣어서 같이 비벼주면 영양 많고 맛있는 닭 종합사료가

만들어 지고 이를 먹은 닭들은 하루가 다르게 무럭무럭 커 갔다.

 

그 시절에 과자도매상을 하시고 양계장을 하신 부모님 덕분에 

난 초등학교 중학교를 어렵지 않게 마칠 수 있었고

함께 일하시는 중상 아주머니, 아저씨 그리고 부모님 우리 가족들은 철철이

좋은 유원지나 산으로 여행을 단체로 갔고 먹을 것도 많이 싸가서 잘 먹고

잘 지내던 시절로 기억하고 있다. 

 

서울에 입성하시고 나서 3~4년도 못 돼서

부모님은 사장님 소리를 듣는 제법 큰 조직을 가진 도매상으로 비즈니스 발전을

이룩하셨다. 이러한 부모님의 성공소식을 전해들은 친척들은

너도 나도 솔깃하여 서울로 서울로 진입을 시도하기 시작하였고

의당 서울로 진출하기 전에 부모님을 미리 만나서 서울 생활과 사업 그리고

여러가지 지원등을 협의하곤 하였다.

그러다 보니 서울에 입성하게 되는 친척(고모, 삼촌들, 외삼촌 이모들, 고종, 이종 사촌들 등)

이 많이도 서울로 올라오게 되었고 한 동안(짧게는 일주일 길게는 수년 간) 우리 집에

머무르거나 얹혀 살거나 하여 우리 부모님으로부터 많은 크고 작은 지원을 받게 된다.

 

먹고 살만하고 저축도 할 만한 살림으로 커졌지만

아버지는 한결같이 검소하고 근면한 삶의 자세를 견지하셨고

매사에 아껴쓰자고 하셨다. 그러나 주변에 도와 주어야 할 친척이 있다면 도와 주셨다.

그래서 아버님은 많은 친 인척들에게 여러 형태로 베풀어 주신 삶을 살아 오셨다.

 

과자 도매상(나중에는 술과 라면 밀가루 설탕 조미료 등 식료품까지 취급함)이라는

작은 사업이지만 아버지는 연구도 하시고 아이디어도 많이 내시고 주위 사람들과

잘 어울리시면서 성공적으로 생활을 이끄시면서 책임과 사명을 다 하셨다.

누나와 내가 동시에 대학에 다니고 동생은 고등학생이었을 때 가장 지출이 컸겠지만

문제없이 모두 가르치셨다.

 

어린 나이에, 사춘기에, 철이 들어서까지 부모님의 지치질 모르고 식지 않는 한결같은

성실함과 노력하시는 모습과 철저한 실행을 통해서 삶의 책임을 다 하시는 모습을

내 스스로가 보고 느끼고 배우고 익히면서 자란 덕분에

나 역시도 성실하고 근면하고 아껴쓰는 생활인이 되 것 같다.

부모의 뒷 모습을 보고 자식은 자란다고 했듯이

부모님의 생활상을 보고 느끼고 따르면서 어느덧 성장을 한 내 모습을 보게 되었을 때

이미 내 속에는 부모님의 지혜와 성실이 몸에 배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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