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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야기

호운의 남이섬 추억





나미나라 겨울 추억


어린 시절
내게 남이섬은 혹한의 시베리아였다.


북한강이 꽁꽁 얼고

한밤중에 잠을 청하려고 하면
멀리서 지지징 .....
얼음이 얼면서 부피팽창으로 얼음에
균열이 가는
긴 굉음의 얼음지진 소리에
어린 가슴이 놀라 흠칫거린 적이 있다.

밤새 추위로 방안의 윗목에 둔
물 사발은 꽁꽁 얼어 있고
방 벽과 조그만 유리창에는
하얗게 성에가 덮였다.


남이섬에서
겨울은 혹독하였다.


날이 밝고
옷을 한껏 껴입고
장갑을 끼고 털신을 신고
귀마개가 달린 털모자를 쓴 후

아버지께서 만들어 주신 철사 썰매를 매고
얼어붙어 어마어마하게 넓은 썰매장이 된
강으로 나간다.

이웃 형들과 누나들과 함께
씽씽 썰매를 타고
피곤한 줄도 모르고
얼음을 지치던 날들.....

한겨울 남이나라에서 내가 즐길 수 있었던
유일한 놀이였다.

그래서 겨울이 나에게는 참 싫고 힘들었던 기억과 추억이 가득한
남이섬이다.


그랬던 남이섬, 남이나라에서 보내 준
이메일 속에
아름다운 겨울, 따스한 겨울
느낌이 좋은 겨울을 담아 보내 준
몇 장의 겨울사진을 들여다보니

내 시린 어린 추억이
정겨운 기억으로 되살아나서
참 좋다.


시간을 내서 겨울의 남이나라를 찾아가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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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이섬의 한 사내아이








1960년 남이섬에
다섯 살 된 사내아이가 있었습니다.


그 아이는,
경상남도 산청군 산청읍 부리마을에서 태어나
경찰서에 다니시는 아버지와 밭일을 하시는 어머니
그리고 두 딸이 사는 시골 집에서 태어나 그 집안의 장남이 된
그 사내아이입니다.


그 아이의 부모님은,
시골에서 큰 희망도 없이 어렵게 살아가기보다는
서울로 가서 돈도 벌고 자식들도 제대로 가르쳐야겠다는
뜻을 세우셨고 드디어 정든 고향을 떠나게 됩니다.
사내아이는 멋도 모르고 시골을 떠나서 멀리 여행을 하게 된 것입니다.
들뜬 아이는 트럭도 타고 배도 타고 이사짐을 풀고 정착한 곳이
남이섬이었습니다.


사내아이의 고모집이 남이섬에 있었고
그 남이섬은 마침 고모부 집안 땅이어서
서울로 가기 위한 2년의 준비기간 동안 살기엔
사내아이 가족에겐 부담도 없고 외롭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더욱 좋았던 것은 아이의 아버지가 염소나 소를 키우는 일을
매우 좋아하셨는데 남이섬은 최적의 목장이었습니다.
염소가 다 자라면 아버지는 몇 마리씩 배에 싣고 내다 팔으셨고
소도 파시고 하였습니다.

풀도 잘 자라고 밤나무도 많고 옥수수도 잘 자랐습니다.
논은 적었지만 추수하고 나면 볏짚으로 새끼도 꼬고 초가집 지붕도
잇고 소여물 끓여 먹일 정도는 되었으니까요.

그때만 해도 사료는 없었으니까 섬에서 자란 식물이 먹이가 되었지요.
감자나 고구마 농사도 잘 되었습니다.
보리도 심었고 수수도 심었습니다.


남이섬엔 사내아이의 집을 포함하여 너댓 집이 그렇게 살고 있었습니다.

모두가 한 집안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사내아이는 주로 형들과 누나들과 함께 놀아야 했습니다.
이듬해 사내아이의 동생이 태어났지만 같이 놀 수가 없었습니다.
형들과 누나들을 졸졸 따라다니면서
많은 것을 익히고 배우고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메뚜기 잡아서 구워먹고
모래사장에서 개미귀신이 개미잡아 먹는 것도 보면서 강에 가서 물놀이도 하고
배고프면 풀밭에 삐삐를 뽑아서 씹어 단물도 빨아 먹고
옥수수깡을 씹어 단물도 먹고
아버지가 만들어 주신 굴렁쇠를 굴리면서 남이섬을 누비고 다녔습니다.

영하 20도를 오르내리는 겨울엔 양말을 두 켤레 신고 귀마개하고
목도리 두르고 장갑으로 중무장한 후 
꽁꽁 언 북한강에 철사로 만든 썰매를 띄우고 배고픈 줄 모르고
얼음을 지쳤습니다.


사내아이는 그 중에서도 굴렁쇠 굴리기가 가장 재미있었습니다.
아침 밥 먹고 누나 형들이 강 건너 방하리 국민학교에서 돌아올 때까지
남이섬은 사내아이의 독차지였습니다.
단연 굴렁쇠굴리기의 기능보유자가 될 법도 합니다.
요리조리 오솔길을 따라서 물구덩이 큰 돌을 피해가면서 마치
자동차 운전하듯이 한 번도 넘어뜨리지 않고 오랫동안
굴렁쇠를 슁슁 거리며 잘 굴린 아이는 남이섬 안에서는 그 아이가 유일합니다.


여름엔 옥수수를 따서
감자를 캐서 삶아 먹었습니다.
수박도 토마토도 참외도 직접 밭에서 따 와서 바로 먹었고
상추도 풋고추도 바로 밭에서 따와서 씻어 먹었습니다.

가을엔 참 풍성하였습니다.
벼를 베어서 고모집 넓은 앞마당에 큰 멍석을 깔아놓고
어른들이 탈곡기로 벼알을 털어내는 풍경은 아무리 보고 있어도
지루하지 않았습니다. 발로 돌리는 탈곡기가 돌아갈 때 내는
웅 웅 소리는 참 신기하였습니다.
햅쌀로 인절미를 만들어 나누어 먹었습니다.

잘 익은 콩도 멍석위에 놓고 도리깨로 쳐서 콩알과 껍질을 분리하였습니다.


남이섬의 가을은 사내아이에겐 가장 기억나는 계절입니다.
유독히 많은 밤나무 중에서도 섬 한가운데 가장 크고 많이 열리는
왕밤나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무르익은 가을 아침 일찍 일어나 이른 밥 얼른 먹고
누나 따라서 아이는 손바구니 하나 들고 밤 주우러 갈 생각에 설레기까지
하였습니다. 전 날 가랑비가 살짝 왔었는지 이슬인지 밤나무 밑의
풀들이 촉촉하게 젖어있었습니다.
떨어진 왕밤은 먼저 보고 먼저 줍는 사람차지입니다.
바구니 가득 밤을 줍고도 더 줍고 싶어서 귀를 쫑긋 세우고 기다립니다.
왕밤나무 가지마다 밤송이가 주렁주렁 달리고 밤송이가 입이 벌어져서
무게를 견디지 못한 윤기가 반들반들한 왕밤이 툭 소리를 내면서
떨어지면 '내 꺼' 하면서 쏜살같이 달려가서 먼저 줍는 그 기분이 삼삼하여
사내아이는 가을이면 어른들이 밤나무의 밤을 털기 전 며칠 동안
계속 밤 주우러 아침잠을 설쳤습니다.
쪄서 먹고 구워 먹고 날로 먹고 밤 맛이 그렇게 좋았습니다.  

  

사내아이는 남이섬에서 2년간 지내면서
몇 가지 잊지 못할 기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여름 홍수가 왔을 때 일입니다.
누나 형 들은 학교도 못갑니다. 북한강 물이 누런 황토색으로 변해서
넘실넘실대며 도도히 남이섬을 삼킬 듯 상류에서 하류로 세차게 흘러내려
갈 때면 장화신고 어른들 뒤따라서 강가로 나갑니다.
꿀꿀거리며 돼지도 떠내려가고 큰 황소도 음메 하면서 떠내려갑니다.
어른들은 안타깝게 쳐다봅니다. 생각 같아서는 배를 띄우고 건져내었으면
하는 눈치들입니다.

강가에 작은 나뭇가지엔 검은 물뱀들이 물살에 휩쓸리지 않으려고
주렁주렁 많이 매달려 있습니다. 사내아이에겐 자연에 대한 경외심과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또 하나는
사내아이의 외삼촌이 공군 조종사로 근무하셔서
정기적으로 정찰비행을 나오셨는데 어머니께 몇 월 몇 일 남이섬으로
정찰비행을 하니 모래사장에 나와서 수건을 흔들고 서 있으라고 편지가
오곤 합니다. 어머니는 섬사람들에게 기별을 해서 모두 비행기 구경
하자고 합니다. 외삼촌은 정확한 시간에 남이섬 상공에 낮게 고도를 낮추어서
굉음을 내며 남이섬을 지나 청평발전소 쪽으로 비행했다가 다시 기수를 돌려
거슬러 올라오며 지나갔습니다. 어머니와 외삼촌의 짧은 만남입니다.


사내아이에게 남이섬의 추억과 아련한 기억이 뚜렷하고
아름다운 것은 다섯 살 여섯 살 때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학교도 가지 않은 때 묻지 않은 철없던 시절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루 종일 먹고 놀고 아무런 의무도 부담도 없던 나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아마도 아이의 부모님은 곧 서울로 이사해야 한다는 커다란 삶의 무게에
눌려서 사셨는지도 모르지요.


서울로 이사 와서 식구들은 추억의 남이섬으로 자주 찾아갑니다.
경춘관광이라는 회사에 팔려 옛 모습이 다 바뀌어 버린 추억의 섬을 자주도 찾아갑니다.

그 아련한 추억 속으로 빠져보고 싶어서 어른이 되어 아내와 연애할 때도 남이섬을 갔습니다.

아이를 낳고 아이들과 부모님을 모시고 남이섬을 갔습니다.
깨끗하게 단장된 남이섬 어느 한 부분에 서서 사내아이 시절 밤 줍던 밤나무가
이 나무인지 저 나무인지 기억을 더듬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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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님과 함께 찾은 남이섬


2007년 9월 9일 일요일에
 





어머님과 누나 자형 그리고 아내와 함께
남이섬을 찾았다.
 
어머님은 약 30여 년 전쯤 남이섬을 한번 와 보셨었다.
요즘 많이 달라진 남이섬을 어머님은 구경도 못하셨다.

아버님께서 서울의 병원에 입원하여 계신 동안 어머님은 서울에 올라와 계신다.
산청에 귀향하신 지 10년 만에 가장 오랫동안 서울에 머무르시고 계시다.
아버님 병문안을 가셨다가 모처럼 교외로 나들이를 하기로 하여 남이섬을 찾아가서 예전에
사시던 기억을 더듬어 보기로 한 것이다.


남이섬으로 찾아가는 길, 가득 들어선 좌우측의 식당과 모텔 등
크고 화려한 왕복유람선을 보시고는 너무도 변해버린 남이섬 주변에 혀를 내 두르셨다.
강을 건너시며 흐르는 강물과 강건너 산들과 남이섬을 번갈아 바라보시며
어머님은 추억 속으로 빠져 드셨다. 
 
46년전 겨울
살고 있던 정든 남이섬이 팔려서 우리 식구는
엔진이 달린 쇄빙선에 이삿짐을 싣고 꽁꽁 얼어붙은 북한강을 
통통선 뱃머리에 달린 쇠뭉치를 떨어뜨려
뱃전의 두꺼운 얼음을 깨면서 천천히 배를 몰아서 남이섬을 떠나 서울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어머님은 당시 38세였고
누나는 9살
난 6살이었다.
 
1960년도 남이섬엔 총 4가구가 살고 있었다.
우리 집과 고모부집 그리고 또만이 아저씨(박도만씨로 기억함)네와 정선이네 집
4개의 집이 너른 남이섬에 자리 잡고 살고 있었다.
 
아버님은 황소와 염소를 키우셨다.
우사(축사)에는 황소를 키우셨고, 염소는 간단한 나무 널판지로 듬성듬성 담을 쌓아서
염소들을 가두고 비를 맞지 않도록 대강 지붕을 이어 놓았었다.
 
염소들이 남이섬의 북쪽에서 맘껏 풀을 뜯어 먹을 수 있도록 아버님은 도랑을 깊게 파서
밭작물을 심어 놓은 남이섬의 남쪽으로 건너오지 못하도록 하셨다.
 
지금의 남이섬 한 가운데 남아 있는 오래된 기와집은 앞강을 바라보고 지어 놓은 고모부 댁이었고
우리 집은 조금 떨어진 곳에 뒷강을 향해 지어 놓은 집이었다.
그리고 고모집에서 남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또만이 아저씨 집과 그 아래에 정선이네 집이
있었다.
 
남이섬에서 뒷강을 배로 건너서 아래쪽으로 내려가면 방하리에 방성초등학교가 있고
방성초등학교를 다녔던 아이들은 나의 작은 누나와 고모부 집의 6촌 형 그리고 서너 명의
초등학생이 전부였다.
 
겨울엔 하도 추워서 방안 윗목에 담아 놓은 물그릇의 물이 꽁꽁 얼고
벽에는 온통 성에가 꽃을 가득 피웠었다.
매년 북한강은 꽁꽁 얼어붙었고 장작을 가득 실은 도라꾸(트럭)도
두껍게 얼은 북한강 얼음 위로 다닐 정도였다.
얼음 갈라지는 소리는 무시무시 했다. 쩌-정- 찌찡 밤이나 새벽에 얼음이
수축 팽창 현상으로
긴 틈을 내며 갈라지는 소리다.
 
누나와 형들이 모두 강 건너 학교에 가고 나면 난 혼자서 굴렁쇠를 굴리면서 섬을 돌아다니며 
놀았다. 누나와 형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면 난 뒤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이것 저것 형들과 누나들이 같이 노는 것을 바라보기도 하였고, 아니면 아버님이 소먹이를 주시거나 염소가 음메헤헤
하면서 풀을 뜯는 것을 쳐다보기도 하였다.
겨울엔 썰매타기, 여름에 물가에서 장구치고, 가을엔 들판에서 이것 저것 먹을거리를
얻기도 하고 봄에는 삐삐를 뽑아먹기도 하고 사시사철 굴렁쇠를 굴리며 놀던 어린 내게
하루 해가 길지는 않았다.
 
어른들은 가평에 장이 서는 날,
나무 배에 같이 타시고 장을 보러 갔다가 오신다.
 
가뭄이 심할 때는 뒷강은 물이 줄어서 무릎까지 바지를 걷고 걸어서 건너갈 때도 있었다고 한다.
홍수가 나면 북한강 상류에서 수많은 것들이 넘실대는 황토물과 함께 섬으로 밀려 내려왔고
어린 아이들은 물가에 가까이 나갈 수가 없었다.
 
남이섬 앞강 중간 쯤에 나룻터가 있었고 조금 걸어서 올라오면
우물이 큰 것이 하나 있었던 기억이 난다.
아버님께서 어른 팔길이 만한 크기의 잉어를 우물가에서 잡아서 손질하시던 것이 기억에 난다.
두레박으로 우물물을 퍼서 잉어를 씻고 잉어의 검은 쓸개를 조심조심 아버님께서 분리하여
한 입에 꿀꺽 목으로 넘기시던 기억이 난다.  
 
어린 나에게는 뛰어 놀기 좋고 먹을 것이 지천에 깔려있는 지상 낙원과 같은 놀이터였던
남이섬이었겠지만 생활을 책임지고 계신 부모님께는 남이섬이 척박한 곳이면서 외로운
벽지 마을에 불과했으리라.
아버님은 염소를 파시기 위해 서울에 가시기도 하였다.
그리고 염소 파신 돈을 전대에 싸서 허리에 두르고 경춘열차 비둘기호를 타고 돌아오셨다.
 
공군조종사이시던 외삼촌이 정찰기를 몰고 남이섬 상공을 굉음과 함께 수건을 흔드시며
낮게 저공비행을 하면 남이섬 사람들은 큰 구경거리였었다.
 
어머님은 지금은 허리가 완전하게 구부러지셔서 조그만 할머니가 되셨지만
내가 어릴 때는 키가 크시고 호리호리 하셔서 별명이 키큰 아주머니였었다.
어머님은 남이섬을 떠나실 때 키가 크신 아줌마였었다.
나는 코흘리개 6살백이 어린아이였었다.
 
그랬던 어머님은 84세의 꼬부라진 할머니가 되셨고
나는 흰머리가 희끗희끗한 52세의 중년이 되어서 남이섬에 돌아 온 것이다.
남이섬은 옛 모습을 희미하게 간직한 채 이제는 국제적인 명소로 거듭 태어나서
모처럼 기억을 더듬으러 찾아오신 어머님께는 생소한 남의 고향같은 모양이다.
하지만 남이섬회사의 민웅기 회장님과 만나서 이런저런 대화를 하시니
그 때 그 기억이 되 살아 나시는 것 같다. 남이섬은 민영덕(내게 고모부님)의 삼촌 되시는 분의
소유였는데, 당시 1억에 경춘관광이라는 회사에 팔렸다고 들어 기억하고 계신 아버님의
말씀을 떠올리셨으며 정희누나도 이곳 남이섬에서의 추억과 기억을 많이 떠올려
민웅기 회장님께 전해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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