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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운이야기

숫자로 보는 나의 인생

 

숫자로 보는 나의 인생


예전엔 우리나라 사람들이 숫자를 싫어했고 생활에서 사용을 꺼려했다.

길을 물어보면 ‘한 시오리 가면 있어요.’ 하고 대답을 하였다.

그리고 내가 고등학교 시험보고 나서 합격자를 확인하기 위해서

학교에 전화를 걸면 이름이 누구지요? 하였고 황득수인데요 하고 알려주면

‘예 축하합니다. 합격하였습니다.’ '예? 합격했다구요? 감사합니다.‘ 하였었다.

그러나 지금은 정확하게 주민등록번호를 인터넷으로 기입을 해야

컴퓨터가 합격여부를 가르쳐준다.

신용카드로 결제하려면 카드번호 비밀번호 유효기간 등의 숫자를 정확하게

입력해야 물건을 살 수 있다.


‘부산까지 기차로 얼마나 걸릴까요?’ 하고 물으면 ‘반나절은 가야지요.‘ 하였다.

그러던 우리들이 새마을운동을 거치고 중화학공업 조선 반도체공업 금융 보험 등

사회전반의 과학화와 합리화 그리고 숫자중심의 가치체계로 변화가 일어나면서

정확한 것을 선호하고 숫자로 이야기 하는 것을 즐겨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email address에도 password에도 개인 ID에도 숫자가 들어가고 하다 못해 식당에 가서

줄을 서면 번호표를 나누어 준다. ‘32번 손님 들어 오세요.‘ 하면 들어 간다.

우체국 은행 관공서 민원창구에도 번호표를 받고서 창구직원이 '몇 번 손님'하고

부르면 창구 앞으로 다가 간다. 요즘은 부르지도 않고 딩동 하면서 LED 전구가 표시하는

숫자 판을 눈여겨 보다가 자기 차례임을 알고 스스로 찾아 가야 한다.


제품을 수출하고 나면 선박회사에서 B/L(선하증권)을 발급하여 주는데

서류 중에서 바이어가 가장 알고 싶어 하는 정보는 B/L No.이고,

등기우편이나 DHL을 보내고 나면 No.를 받아서 우편물 추적을 할 수 있다.

해외에서 돈을 송금하도록 요구하려면 반드시 입금계좌번호와 SWIFT NO.를

알려 주어야 한다. 우리 사회는 이제 하루도 숫자를 멀리하고 살 수 없도록 되어 버렸다.


상품에도 8.15 콜라, 2% 음료수, 기계는 Model No. 20, 휘발유 할인은 3.6.9day

386, 586 컴퓨터 20/30 세대, 70/80 세대, 386세대,

어지간히 숫자에 어두운 노인세대들도 요즘은 나이를 여쭤보면

난 6학년 8반이라고 하시고(68세)

나도 9988 1234해야지 하시기도 하고

나이야가라 하시면서 건배를 하시기도 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내 인생도 역시 숫자로 시작하여 숫자로 마감될 것이다.

나 황득수는

1956년 9월 13일 태어났기에 내 주민등록번호는 560913-\*&%$#@

따라서 세는 나이로는 53세다. 음주운전으로 적발되어 경찰서에서 조서를 꾸밀 때

주민등록번호하면 얼른 알려주어야 한다. 우리를 70/80세대라고 한다.

1950년 6.25 전쟁이 시작되었고 1953년 휴전이 되었다.

그 후에 우리들의 부모님들은 많은 아기들을 생산하셨고 우리들을 전후 베이비붐 세대라고 부른다.


호적등본을 떼어보면 본적이 경남 산청군 산청면 부리 370번지이고

주민등록증에 기록되어 있는 사는 곳은 서울 노원 하계 281 한신코아빌라 8동 203호

사업자등록증에 나타나 있는 사무실은 서울 종로 낙원 58-1 종로오피스텔 1014호이고

등기우편을 받으려면 우편번호가 매우 중요한데 110-320이다.


가족사항은 2남 2녀 중에 내가 장남이고

나는 현재 26세 23세의 사내아이 둘을 낳아 키우고 있다.

아내도 2남 2녀의 가정에서 막내딸이다.

장남과 막내가 만난 것이다. 요즘엔 첫째 즉 1남(또는 장남)은 인기가 없어서

장가가기가 용이하지 않지만 그 때만해도 그럭저럭 눈 감아 주던 시절이었다.


4살 때 고향 산청을 떠나 5살 6살 때 남이섬에서 2년 간 살았고

7살 때 서울 송천동으로 이사를 왔다.

어린 시절 3.15 부정선거 4.19의거 5.16 혁명이 지나갔다.

초등학교 1학년 큰아버지로부터 받은 세뱃돈 50원 지폐를 기억하고 있는데

색깔이 연한 갈색 비슷한 것이 지금의 5000원과 닮았던 것 같다.

1원이면 또뽑기, 5원이면 떡뽂기, 10원이면 웬만한 과자는 사 먹을 수 있던 시절에

우리 집은 과자도매상을 하였는데 매일 수금한 돈을 아버지와 어머니는 밤에

지폐와 동전을 분리하고 동전은 돌가루 포대를 잘라서 1원짜리를 50개 말아서 50원

5원짜리를 50개 말아서 250원으로 만들어서 다음날 방산시장에 물건을 매입하러

가시곤 하였다.


서울미아국민학교(초등학교)를 설립한 1964년 그해 나는 최초로 입학을 하여

6회 졸업생이 되었다. 6학년 때 7반을 하였고 56번을 하였던 것 같다.

당시에는 키가 크면 번호가 높은 숫자이다.

1969년 은행알 굴리기(뺑뺑이) 추첨으로 중학교에 입학하였는데

내가 잡은 은행 알 번호가 17번,

서울시 교육감이 학교와 은행 알 번호를 라디오로 발표를 하였다.

‘17번’ ‘17번’ ‘갱신주학’ ‘갱신주학’

‘뭐라고 무슨 그런 학교가 있는 거야?’ 난 의아해 하였다.

심한 경상도 사투리로 방송을 한 교육감의 발음을 제대로 해석하면 ‘경신중학’이다.

경신중학은 대한민국에서 학교 설립역사가 2위인 학교다.

미국의 언더우드 목사가 설립을 했고 그 해가 1886년도였다.

재미있는 것은 1학년 땐 1반에 소속이 되었고 3학년 땐 3반에 소속이 되었었다.

그 당시 축구를 잘 했던 경신고등학교엔

차범근 선수가 11번 백넘버를 달고 활약을 했고 그때부터 차범근선수는 11번이 별명처럼

되어버렸다. 축구협회 기술이사로 있는 김진국 선수가 축구부 주장이었고

내 이름과 비슷한 한득수 골키퍼가 골을 잘 막아내어 공연히 내가 으쓱해졌던 기억이 있다.

    

아펜셀러 목사가 1885년에 설립한 배재고등학교에 입학시험을 보고 합격을 하니

경쟁률이 8.5대 1이었다고 했다. 

1학년 때엔 9반(성적이 좋지 않은 신입생들이 대부분 10반에 배치되었다고 한다)

3학년 땐 8반이었고 반장을 지냈고 그때 번호가 19번이었을 거다.

서울에는 당시 5대 공립과 5대 사립이 있었다. 5대 사립 중에 배재고가 포함된다.

반창회를 하면 꼭 번호까지 기억하는 친구가 있다. 네가 48번이고 내가 50번이었을걸...

합창반에서 2nd base를 담당하였고 교내에서 4중창을 하여 1등 우승메달도 받았다.

고등학교 3학년 때 키는 172센티미터 몸무게가 56kg

양쪽 시력이 공히 0.4였었다. 달리기를 하면 100미터를 13.8초~14.2초였고

철봉을 하면 30개 이상을 했었고 야구공 멀리 던지기를 하면 48미터가 나갔다.

제자리에서 넓이 뛰기를 하면 210센티미터를 뛰었고 도움닫기를 해서 멀리뛰기를 하면

최대 4미터 30센티를 뛴 적이 있었다.

1975년 졸업을 하면서 우리가 90회라고 하였으니 학교설립은 1885년이고

대한민국에서 가장 오래된 전통을 자랑하는 학교라고 자랑을 삼고 살고 있다.


고려대학교는 1905년에 설립하였고 설립자는 인촌 김성수 선생님이다.

2005년이 되니 설립 100주년 기념행사를 맞이하였다고 크게 자축을 하였다.

올해가 2008년이니 고려대 103주년 배재고 123주년 경신중 122주년

이를 모두 합하면 348주년 전통과 역사가 내 몸과 마음에 녹아 깃들어 있다

학번이 75041이었고 75학번이라고 불린다.

3학년에 ROTC 후보생으로 가입한 고려대 ROTC 학군단은 102학군단이었고

당시 후보생 번호는 3147번이었다. 101학군단은 서울대였다.

ROTC 동기생끼리는 몇 학군단이니? 하고 묻고 대답은 ‘112 동국대야’하였다.

상위 계급자가 부르면 ‘네, 3147번 황득수 후보생’하고 크게 대답을 해야 하였다.

1979년 2월 23일 ROTC 17기 포병소위로 임관을 하였고 군번은 79-02680이다.

군번은 임관시험의 성적순으로 매겨진 것이라고 알고 있다.

따라서 내 임관시험 성적은 과히 좋지 않았다.

대학교 학과의 학점은 4.0만점이었고 난 평균 3.0~3.4 정도가 된다.


광주포병학교를 졸업하고 15사단 68 포병대대에서 24개월을 근무하였고

당시 동기생이 모두 11명이 같은 대대에 배치를 받았었다.

부대에서 집으로 친구에게 편지를 쓸 땐 육군 제 8573부대 본부포대 중위 황득수로

표기하였다.

우리 15사단을 중심으로 좌측엔 3사단 우측에는 7사단 후방에는 27사단이 있었다.

육사 35기와 ROTC 17기는 서로 동기지간으로 이야기 하였다.

포병은 숫자를 많이 다루므로 숫자의 착오가 일어나면 105mm 야포는 포탄이

엉뚱한데 떨어지므로 숫자를 일반부대와는 달리 부른다.

1234567890을 포병에서는 하나 둘 삼 넷 오 여섯 칠 팔 아홉 공으로 호칭한다.

예를 들어서 3940미터를 이야기 하려면 ‘삼아홉넷공미터’로 발음을 하게 된다.

248고지는 ‘둘넷팔 고지’ 1680부대는 ‘하나여섯팔공부대’라고 해야 한다.

본부부관과 브라보포대장을 지냈고 1981년 6월 30일 26개월의 군복무 기간을 마치고

1981년 6월 30일에 소집해제를 명받았다.


1981년 7월 1일부로 (주)미원 영등포 사업본부에 입사를 하였다.

100여명의 신입직원을 채용하였는데 우리들이 미원그룹 공채 10기라고 하였다.

이때 합격자들의 경쟁률은 100:1이라고도 하였고 수십 대 일의 경쟁을 뚫고

입사한 자랑스런 동기생이라고 우리끼리 자랑을 했었다.

입사 합격자들 중에 ROTC 출신들이 많았고 특히 영등포 사업본부로 발령을 받은

입사동기들 중에는 9명이나 되었고 본사 및 공장에도 많은 ROTC 출신들이 함께

입사를 하였는데 그 중에 가장 늦은 선배는 7기 선배도 같이 입사를 해서 화제가 되었었다.

입사동기는 입사동기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당시에 미원그룹을 이끄는 엘리트 중역들이 ROTC 1기 선배들이 계셨는데 그 유명한

이태욱 영업본부장(경희대 ROTC 1기)과 하용채 기획담당중역(서울대 ROTC 1기)

그리고 부서장 급에도 ROTC선배님들이 많았다.

 

대학 2학년 때(1976년) 영어공부서클인 타임반에서 만나서 7년을 사귀어 온

아내 정진선과 결혼을 한 것은 1982년 10월 31일이었다.

신혼살림은 월계동의 13평짜리 월계시영아파트를 540만원인가 지불하고 매입을 하였다.

당시에 내 월급이 24만원, 보너스는 년 600%를 받았다.

그 때만해도 미원그룹이 10대 그룹에 드는 잘 나가는 회사였지만 지금은 많이 쇄락하였다.

1983년 8월 2일 삼복더위에 큰 아들 태호를 출산하고 그 이듬해인 1984년도

결혼 한 지 2년 만에 근처에 신동아 아파트 20평짜리를 매입하여 이사를 하였다.

아내가 알뜰하게 살림을 잘 꾸려온 덕분이다. 1984년 초 입사 2년 6개월 만에 나는 대리로

승진을 하였다. 그리고 1986년 11월 10일 둘째아들 용호를 낳았다.

1986년 5년간 근무하였던 품질관리과에서 판촉과로 보직이동을 하고 과장으로 승진을

하게 되어 ROTC우대 인사정책의 혜택을 제대로 누릴 수가 있었다.


1983년 비행기를 타고 일본으로 출장을 처음 가게 되었는데 기억으로는 일본 엔화가

한국의 원화와 비교하여 4.3배였다. 동경의 비즈니스호텔에 묵었는데 하룻밤 숙박료가

당시에 45$ 수준이었다. 신바시역 밑에 값싼 스넥코너에서 즐겨 사먹던 돈부리라는

아침식사는 당시 380Yen이어서 식사비를 줄여서 난 출장비를 절감할 수 있었다.

나리타공항에서 동경시내로 들어가는 리무진버스요금은 그때 3000엔 정도로 기억을 하는데

정확한지 확신은 없다.


판촉과로 보직이동을 하고나서 1987년에는 자가용을 사는 직원들이 하나 둘 생길 때였다.

운전면허는 영등포에 있는 학원에 가서 당시 영업부장이셨던 김00부장과 함께

학원등록을 하고 실기 연습을 받았다.

회사에서 13만원인가 100%를 지원하여 주었고 필기시험은 98점을 받았고

2번 실기시험 봐서 면허를 획득하였는데

면허를 따면 마치 개선장군과 같이 으쓱해 하던 시절이었다.

면허증에 있는 면허번호는 서울 87-803779 1종 보통이다.

그리고 면허를 따자마자 업무상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현대 프레스토 3년 된 중고차를 샀다.

기억으로 자동차 번호가 서울40다 - 1925호였다. 아버님 출생년도가 1925년이라 외우기도 쉬웠다. 그 차로 2년 타고나서 기아 DOHC 1500cc 캐피탈 새 차를 구입하였는데

경제속도로 운전을 잘 하면 연비가 15km/L로 매우 마음에 들었었다.

차 뒷 번호가 1479였는데 직원들이 차번호가 외우기 좋다고 하였다.

일사천리(1472) 발음과 비슷하여 그렇다나.. 

1995년부터 회사에서 영업부서 휴대전화를 무상으로 사서 나누어 주었는데

그때부터 사용한 전화번호 뒷자리가 5558번이다.

왜냐하면 당시 신동아 아파트 시절부터 집전화의 뒷 번호가 5558이었기 때문이다.

 

부장직무대행이라는 신종 직급(차장급)이 생겼고 그 과정을 거쳐서

1993년 38세에 부장진급을 하였고 38평형 한신코아빌라로 분양을 받아 입주하였다.

지하 주차장 13평까지 포함하여 분양면적이 51평이나 되었다.

당시 자네 몇 평에 사냐고 물으면 예 38평에 삽니다. 하고 대답하였는데

당시에 과장 정도면 32평은 살아야 하고 부장이 되면 37평이나 38평 그리고

중역이 되면 42평 정도에는 살아야한다고 이야기를 하곤 하였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이사를 한 횟수는

산청집-남이섬-송천동-미아리 성동이네-미아리 개천가-미아리 중국집옆

-미아리 뒷길집-월계동 시영아파트-월계동 신동아아파트-하계동 한신코아빌라

총 10 집에서 살았다.


자동차(승용차)도 직급에 따라서 배기량을 어느 정도 매겨 놓고

대리는 1300cc 과장은 1500cc 부장은 1800cc 이사는 2000cc 그리고 전무 사장급은

2500cc 3000cc 회장은 3500cc 또는 4000cc를 타는 것으로 획일화된 개념도 있었다.

사원에서 대리는 3년 대리에서 과장은 3년 과장에서 차장은 다시 3년 부장은 또 3년

그리고 이사가 되려면 5년 상무 2년 전무 2년 부사장 2년 사장 2년 특별한 문제가 없으면

사원에서 사장이 되는데 25년이 걸린다고 생각한 시절이 있었다. 27세에 입사를 하여

52세에 사장이 된다면 최고의 승진속도라고 할 수 있었다.

보통은 55세 이후에 대기업 사장이 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던 것이 IMF를 겪고 나서 기업의 나이 많은 사람들이(56도와 38선) 많이 퇴사를

하다보니 최근엔 오히려 이사 상무 차장 부사장 등이 직급이 없어진 회사도 있고

젊은 경영자가 신세대 감각으로 추진력을 가지고 잘 할 것이라는 명분 하에 사장이 되는

나이가 줄어들어서 내 입사동기 중에는 49세에 대기업 사장이 된 친구도 있다.

그리고 후배는 45세엔 중견 기업의 사장에 올라 부러움을 사기도 하였다.

나는 만 15년 미원에서 근무하였고 만 40세가 되던 1996년 10월 31일에 부장으로

퇴사를 하였고 그 날이 공교롭게도 나의 14주년 결혼기념일이었다.

25개월 간 서울정화개발주식회사에서 전무이사로 근무를 하였다.

 

1999년 12월 31일에 퇴사를 하고 매일경제신문사의 매경안전연구원에서 시행하는

무역창업과정 3기에 신청하여 공부를 열심히 하여 70~80명 중에 2등으로 수료하였고

즉시 사업자 등록을 내었다. 수료를 하고나서 내가 다시 수강생을 교육하였는데 1시간당 7만원의 수강료를 받아서 월 56만원 정도 소득을 올린 달도 있었다. 맨앤비즈통상이란 이름으로 도매-무역업을 창업한 것이 1999년 5월 1일이었다.

사업자등록번호는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는데 106-02-86203이며

무역업고유번호는 11792880이다. 지금도 이용하는 S은행 계좌는 297-05-003*&%이고

외화종합통장계좌번호는 297-82-000@#$이다.

휴대전화번호는 017-&*%-5558 집전화도 *@$-5558이며

회사전화는 3676-5888 팩스번호는 3676-013*이다.

email 주소는 4개를 사용하는데 dsh1357@*&%$#@\.net 이다.


99881234하고자 에세순(타르 니코틴이 1.0mg, 0.10mg)하루 1갑, 소주 1.5병(맥주로는

1500cc)을 상한선으로 정하고 2~3일에 한 번 꼴로 마시고 있다.

중랑천 걷기운동의 왕복 거리는 약 5km이고 소요시간은 약 1.5시간이다.

아침 5시~6시에 기상하고 회사까지는 172번 버스로 출근하며 30분 동안 책을 읽으면서

오면 사무실 도착시간은 약 7시가 된다. 아침을 먹지 못한 날은 김밥 1줄(1000원)을 먹고 퇴근은 6시 30분에서 8시 사이에 하며 5호선 지하철 4번 출구로 들어가서 6-3 프랫폼에서

지하철을 기다려서 청구역에서 1-3 프랫폼에서 지하철을 기다려 다시 6호선으로 갈아타고

태릉입구에서 내려서 3-3 프랫폼에서 7호선 지하철을 갈아타고 하계에서 내리면 약 40분이

소요되고 역에서 집까지는 8분이 걸린다. 


11월 1일 아버님께서 패혈증으로 돌아가셨으며, 12월 19일 49재를 올렸다.

그리고 11월 24일 장모님께서 별세하셨고 1월 11일에 49재를 드렸다.

아버님은 하늘문 공원의 사랑관 25호에 장모님은 사랑관 22호에 모셨다.

금년 5월이 되면 이천의 호국원이 개원하고 아버님의 유골을 이장 봉안할 것이다.

이장의 경우에는 약 1달간의 심사과정이 필요하다고 하니 6월에나 이장 봉안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지금 하늘문 공원에 임시안치 계약기간인 6개월이 초과될 전망이다.

약 3달의 추가 안치기간 연장이 필요할 것이다.

 

2월 7일 설날엔 26명의 일가친척이 우리 집을 다녀갔고 어머님께 세배를 드렸다.

내 평균 설날 절값은 최근 몇 년 동안 30만원 정도 소요된다.

나이별로 1만원에서 3만원까지 절값을 주고 있다.


매월 사무실 유지 및 각종경비 등으로 지출되는 돈이 월 평균 220만원~230만원이 된다.

동남아 출장을 한 번 다녀오면 보통 100만원의 비용이 든다.

신용카드는 23일 결제일이고 사무실 관리비는 15일이며

의료보험과 국민연금은 매월 10일 통장에서 빠져나간다.


70세까지 또는 75세까지 지금 하고 있는 무역업을 계속 하고 싶다.

60세 전까지 돈을 벌어 모아야 할 터인데 열심히 하는 길 밖에 없다.

65세가 되면 국민연금이 조금씩 나올 것이고 90세까지 살려면

매월 200만원씩 필요하다고 보면 15년 x 12개월 x 200만원 = 7억 2천만원이 필요하다.


앞으로도 더욱 많은 숫자와 함께 생활하게 될 것이다.

기억해야 할 숫자들도 많고

기억해야 할 일들도 많아질 것이다. 

하지만 앞으로는 기억에서 잊혀져 가는 숫자와 잊혀져 가는 일들이 더욱 늘어 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