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할 것인가 뺄 것인가
영조는 탕평책으로 명군(名君) 소리를 들었다. 탕평은 중국 고대 정치 기록인 ‘서경(書經)’의 ‘무편무당왕도탕탕 무당무편왕도평평(無偏無黨王道蕩蕩 無黨無偏王道平平)’에서 나온 말로 한쪽에 치우치거나 파벌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는 일종의 인사 원칙이다. 당쟁이 극심하던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발상이었다. 영조의 뒤를 이은 정조도 탕평책을 계승해 조선 후기의 전성기인 영정조 시대를 이끌었다.
새삼스레 역사를 끄집어내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아서다. 4.11 총선이 끝나자마자 정치권은 곧장 연말에 치를 대통령선거를 겨냥하는 모양새다. 누구누구가 나오느냐로 요란하고 경선을 치르느니 마느니로 시끄럽다. 물론 총선 결과를 놓고도 이겼느니 졌느니, 일등공신은 누구이고 책임은 누가 져야 하느니 하며 갑론을박이다.
그러나 유권자의 한 사람으로 아쉽다고나 할까, 아니면 한심하다고 할까, 어쨌든 마음이 편치 않다. 이번 총선은 그 어느 선거보다도 난장판이었다는 게 국민과 언론의 일반적인 평가다. 별로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정책 대결’ 운운한 것은 처음부터 지킬 마음도 없이 표심만 노린 대(對)국민 사기극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로지 ‘내 편이냐, 네 편이냐’ 하는 진영 논리만 통했다. 패거리 짓지 말라는 탕평책의 교훈은 온데간데없다.
명색이 국회의원 되겠다는 사람이 시정잡배도 입에 담지 못할 막말을 해대도 우리 편이니까 감싸고 성추행 혐의가 있어도 우리 편이니까 눈 감고 모른 척하는 판에 무슨 정책 대결을 기대하겠는가. 몇몇 특정 후보 얘기가 아니다. 정치판이 온통 다 썩었다. 자기들 허물에는 함구하고 상대방 허물은 사실이든 아니든 무조건 악다구니부터 쓰고 본다. 그야말로 남의 눈에 티는 보면서 제 눈에 들보는 못 보는 격이다.
이런 험한 꼴은 선거 이전부터 이미 알조였다. 여야를 가릴 것 없이 누가 더 정의롭고 누가 더 역량 있느냐는 애초부터 관심 밖이고 어느 파벌이냐가 공천의 가장 큰 잣대였으니 탕평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그런데도 반성하거나 사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게 문제다. 기껏해야 ‘국민의 엄중한 뜻을 겸허히 받들겠다’는 입에 발린 소리나 할 뿐 무엇이 잘못됐고 앞으로 어떻게 고쳐 나갈 것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기미는 전혀 안 보인다. 마음은 콩밭에 가 있다고 벌써부터 대선을 바라보며 싸울 궁리뿐이다.
이렇게 반성할 줄 모르는 정치권이라면 누가 대통령 후보로 나오든, 누가 당선되든 결과는 뻔하다. 또다시 국민을 편 가르고 서로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만 남길 게 틀림없다. 변변한 것 하나 없는 좁아터진 땅덩어리에서, 그것도 두 동강이 난 채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절박한 상황에서 서로 돕고 힘을 합해도 모자랄 판에 서로 빼앗고 분열하려고 해서야 우리 민족에게 무슨 희망이 있겠는가.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 백악관에 입성하기까지 숱한 일화를 남긴 에이브러햄 링컨은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이다. 링컨 하면 정직, 독서, 노예 해방 등의 단어가 먼저 떠오르지만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으로 추앙되는 이유는 바로 ‘통합의 대통령’이기 때문이다. 남북전쟁을 마다하지 않은 것도 연방의 붕괴를 막기 위해서였고 전쟁에서 승리한 다음에 가장 먼저 생각한 것도 응징이 아니라 화합이었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링컨이 아니었다면 아마도 미국은 지금 모습과 많이 다를 것이고 오늘날의 번영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게다.
오는 12월의 대선은 내년 2월부터 대한민국호(號)를 5년 동안 이끌 제18대 대통령을 뽑는 중요한 정치 행사다. 유권자들이 어떤 지도자를 선택해야 하는가는 새삼 물어볼 필요도 없다. 우리 정치판에서도 ‘뺄셈의 정치’가 아니라 ‘덧셈의 정치’를 지향하는 링컨 같은 인물이 나와야 한다. 남의 단점을 부각시키려 들기보다 나의 장점을 내세우는 당당한 정치인이 보고 싶다. 진영 논리에 함몰돼 자기 패거리 잇속만 챙기려 드는 구닥다리 정치인도 안 되지만 누구 편인지 뻔히 보이는데도 어느 진영에도 속하지 않는 것처럼 위장하는 기회주의자도 곤란하다.
비록 작기는 하나 대한민국은 자랑스러운 나라다. 세계를 주름잡는 한국인들을 보면 애국심이 절로 솟구친다. 얼마 전 세계은행 총재로 선임된 김용 다트머스대 총장도 자랑스러운 한국인의 한 명이다. 유엔은 이미 반기문 사무총장이 맡고 있으니 국제통화기금(IMF)과 함께 3대 국제기구 가운데 2곳의 수장을 한국이 배출했다. 과문인지 몰라도 일찍이 지구상의 그 어느 나라도 이루지 못한 위업을 한국이 해낸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문화, 기술, 의료, 음식 등 다양한 분야에서 한류가 세계를 휩쓰는 마당에 정치라고 해서 허구한 날 못난 꼴만 보여서야 되겠는가.
정치인과 유권자 모두 대오각성하자. 그리고 이번에는 세계에 내세울 만한 멋진 대통령을 한 번 뽑아 보자.
(전) 연합뉴스 경제부장, 워싱턴특파원(지사장)
(전) 연합뉴스 논설실장
(현) 연합뉴스 동북아센터 상무이사
(현) (사)선진사회만들기연대 편집위원, 운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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