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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것들

영웅 만들기

영웅 만들기

 

  2001년 9월11일 알지도 못하는 적의 공격을 받은 미국은 혼비백산했다. 미국 본토가 물리적 공격을 받은 것은 건국 이래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 때에도 없던 일이다.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본도 미국 본토는 엄두도 못 내고 4천km나 떨어진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했을 뿐이다. 테러범들이 미국에서 여객기 4대를 동시에 공중 납치해 자살 공격을 감행한 9.11 테러의 희생자는 무려 3천 명을 넘었다.

  
느닷없이 남의 나라 이야기부터 꺼내는 것은 얼마 전 1.21 사태 45주년을 맞는 우리의 자세를 보며 떠오른 단상 때문이다. 북한 무장공비 31명이 박정희 당시 대통령을 비롯한 남한 요인들을 암살하려고 했던 1.21 사태는 ‘역사 속의 사건’으로 진작 파묻혔다. 국민 대부분은 육군 수도방위사령부가 개최한 ‘리멤버 1.21 행사’에 관심조차 없다. 수방사가 서울시와 공동 주최한 ‘나라사랑 걷기대회’도 1.21 사태를 기억하자는 애초 취지는 온데간데없고 여배우 김태희와 연애하다 군인복무규율 위반으로 연초에 근신 처분을 받은 후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연예병사 비에게만 초점이 맞춰졌다.

  
미국의 9.11 추모는 우리와 사뭇 다르다. 대통령부터 일반 국민에 이르기까지 한마음 한뜻으로 사건의 의미를 되새긴다. 의사당에서는 여야 의원들이 모여 고인들 명복을 빌고, 당시 가장 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뉴욕 세계무역센터 붕괴 현장, 즉 ‘그라운드 제로(Ground Zero)’에서도 행사가 잇따른다. 나아가 교과서와 시청각교재까지 만들어 학생들에게 9.11의 진실을 가르치고 안보의식을 고취하는 나라가 미국이다.

  
1.21 사태와 9.11 테러를 동일선상에 올려놓고 비교하는 것은 무리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목숨 걸고 나라를 지킨 할아버지 이야기는 왜 교과서에 나오지 않나요?”라고 묻는 고(故) 최규식 서장 손녀(13)의 글을 전한 신문 보도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최 서장은 “청와대를 까러 왔다”는 무장공비들을 청와대 지근거리인 자하문에서 막은 우리 측 첫 순직자다. 그가 아니었다면 어떤 상황이 전개됐을지 아무도 모를 일이다.

  
미국은 영웅을 잘 만드는 나라다. 거리마다 나라와 사회에 공을 세운 지도자와 군인 등의 동상이나 기념관이 즐비하며 도로명도 이들 이름을 따서 지은 경우가 많다. 특히 ‘시민 영웅’을 발굴하는 재주가 뛰어나다. 9.11 사태 현장에서 목숨을 잃은 소방대원이나 테러범들의 백악관 내지 의사당 공격 기도를 저지한 피랍 여객기 승객과 승무원도 당당한 영웅이다. 베트남전쟁과 6.25전쟁은 물론이고 제1, 2차 세계대전 실종군인까지 기어이 유골을 찾아내 최고의 예우를 갖추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가? 최 서장의 아들(51)이 “대통령을 살해하려던 김신조(유일한 생존 공비) 씨는 기억되고 아버지 같은 분들은 잊히고 있는 대한민국의 현실이 잘 이해되지 않는다”고 개탄했다는 보도에 백번 공감한다. 그러나 기억 안 되는 게 어디 최 서장뿐이랴! 멀리는 이름도 없이 산화한 6.25 학도병에서 가까이는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 도발로 희생된 국군 장병과 시민에 이르기까지 우리에게도 영웅은 무수히 많다. 다만 영웅으로 치켜세우려 하지 않고 기억하려 들지 않을 뿐이다.

  
그나마 ‘제2연평해전’ 당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의 평범하지만 아름다웠던 삶과 그들을 잃고 고통스러워하는 유족들의 아픔을 그린 영화가 만들어지고 있다는 소식에 한 가닥 위안을 받는다. 게다가 꽤 이름 있는 배우들이 출연료를 한 푼도 안 받는 ‘노 개런티’로 출연하고, 제작비 일부를 일반 시민의 출자로 충당하는 ‘크라우드 펀딩’이 호조를 보인다니 더 개운하다.

  
큰일 겪다 보면 우왕좌왕할 수 있다. 미국도 그랬다. 9.11 사태가 진정되면서 이런 정보를 놓쳤느니, 저런 조치를 취했어야 했느니 등의 아쉬움과 질책이 잇따랐다. 하지만 특정 인사나 정파의 책임을 묻고 자리에서 쫓아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후 대책을 제대로 세우려는 원인 분석 차원이었다. 당시 워싱턴 특파원이었던 필자의 기억으로는 9.11 사태의 책임을 지고 물러난 사람은 없었다. 천안함 사건 때의 우리네 사정과는 영 딴판이다.

  
미국은 그보다는 영웅 만들기에 주력했다. 수많은 9.11 영웅이 탄생한 배경이다. 우리도 남 헐뜯고 꼬투리 잡으려 들지 말고 1.21 영웅도 챙기고 천안함 영웅도 만들자. 그리고 기억하자! 영웅이 많을수록 자랑스러운 나라다.

 

 

 

이도선 

    (사)선진사회만들기연대 편집위원, 운영위원
    연합뉴스 동북아센터 상무이사

    (전) 연합뉴스 논설실장

    (전) 연합뉴스 경제부장, 워싱턴특파원(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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