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우리들의 것들

교범(매뉴얼, manual)이 있거나 말거나

교범이 있거나 말거나

 

   전국이 온통 암흑에 휩싸일 뻔했던 대정전(total blackout) 사태의 책임 소재를 놓고 갑론을박이 한창이다.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9월15일 오후 전력 수요가 몰리자 아무 예고 없이 30분씩 돌아가며 전국 수백만 가구의 전기를 끊는 순환 단전 조치가 늦은 저녁까지 이어져 방방곡곡에서 대소동이 빚어졌다. 느닷없는 정전에 가정이든, 상가든, 공장이든 대경실색했고 운동경기가 한동안 중단되기도 했다.

  그나마 이 정도로 끝난 게 다행이다. 까딱하면 대한민국 전체가 완전히 마비될 수도 있었다. 일단 대정전 사태가 발생한 뒤에 전국의 전력 공급을 재개하려면 최소한 사흘이 필요하고 길게는 일주일이 걸린다고 한다. 이 사이에 국민이 겪는 고통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산업시설과 금융·정보통신망의 전면 가동 중단에 따른 피해는 가히 천문학적이다. 아마 전기가 단 며칠만 끊겨도 경제성장률을 몇% 포인트는 끌어내려야 할 판이다. 이럴 때 북에서 밀고 내려오기라도 한다면 전쟁은 해볼 여지도 없다. 이렇게 어마어마한 일을 단 몇 시간의 순환 단전 조치로 막았다면 되레 한전과 전력거래소를 표창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엄청난 일이 간단한 교범(매뉴얼)을 제대로 지키지 않아 빚어졌다는 데 사태의 심각성이 있다. 교범대로라면 사고 당일에도 4시간 정도의 여유가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후에도 몇 단계에 걸쳐 대응조치가 발동할 계제가 있었으나 ‘나 몰라라’ 하고 있다가 급기야 전대미문의 단전 사태를 부른 것이다.

  이번 사태를 지켜보며 1990년대 중반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연수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을 때의 경험이 생각난다. 집 구하고 아이들 학교 넣고 하느라 정신없이 며칠을 보낸 뒤 시내에 나갈 일이 있었다. 아직 미국 면허가 없어 한국에서 갖고 간 국제면허로 조심스레 운전하고 다니다 놀라운 일을 목격했다. 비교적 번화한 사거리에서 신호등이 고장 났는데도 차량들이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운행하는 것이었다. 가만히 살펴보니 차들이 사거리에 이르면 일단 정지한 뒤 순서에 따라 차례차례 지나가고 있었다. 한 대씩 교행하다 보니 평소보다 속도를 다소 늦춘 것만 다를 뿐 소통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한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만약 서울 한복판에서 신호등이 고장 났다면 십중팔구 아수라장이 연출됐을 게다. 서로들 조금이라도 먼저 가려고 앞 차량 범퍼에 닿다시피 바짝 붙는 바람에 사거리는 순식간에 먹통이 된다. 어느 ‘의로운’ 모범택시기사가 돈벌이까지 포기하고 질서를 잡으려 해도 지시를 잘 따르지 않는다. 결국 모두들 뒤엉킨 채 남 탓이나 하기 십상이다. 신호등 관리가 엉망이라느니, 시민의식이 실종됐다느니, 교통경찰이 아무리 많아야 소용없다느니 등등. 그러나 똑같이 신호등이 고장 난 로스앤젤레스의 사거리에는 교통경찰이나 모범택시기사 없이도 잘만 굴러갔다.

  나중에 한국인 유학생에게 물었더니 “이 사람들은 그냥 매뉴얼대로 해요”라며 대수롭잖다는 듯이 말했다. 긴급 상황이 일어나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를 평소 교범에 따라 훈련하고 지진이든, 해일이든, 산불이든 실제 상황이 벌어지면 그대로 실행한다는 것이다. ‘이게 바로 미국의 힘이로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 후에도 1년밖에 안 되는 짧은 연수기간에 ‘미국의 힘’은 수도 없이 체험했다

  이러한 느낌은 올봄에 다시 한 번 강렬하게 찾아왔다. 대지진과 쓰나미라는 사상 최악의 자연재해에 대처하는 일본 국민을 보면서다. 서로 먼저 대피시키고 음식을 양보하는 등 사회 곳곳에서 정밀하게 작동하는 교범에 전 세계가 혀를 내둘렀다. 일각에서는 구호물자 전달이 늦어지는 등 일부 차질이 빚어지자 교범이 없기 때문이라며 융통성 없는 일본 사회를 비아냥대는 듯한 태도를 보이기도 했으나 교범이 있어도 안 지키고 없어서도 안 지키는 우리로서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한전의 ‘선(先)조치 후(後)보고’를 둘러싸고 과잉대응이니, 불가피한 선택이니 하며 말들이 많다. 예비전력 허위 보고에 대한 진상 규명도 마땅히 이뤄져야 한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교범을 무시했든, 교범이 너무 낡았든, 우리 사회에서는 교범이 작동하지 않는 일이 너무 빈번하다는 사실이다. 지난번의 은행 대출 전격 중단이라는 금융 사상 초유의 사태도 교범이 작동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교범을 제대로 지키지 않아 일어난 이번 사고는 전형적인 ‘후진국형 인재(人災)’라고 할 수 있다. 책임자를 문책하라는 요구가 빗발치는 것도 당연하다. 문제는 그렇다고 대통령이 물러날 수도 없고 지식경제부 장관이나 전력거래소 이사장이 그만둔다고 해서 끝날 일도 아니라는 점이다. 결국은 하드웨어나 소프트웨어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만들고 운용하는 사람이 문제다. 물론 교범이 없으면 만들고 낡았으면 새로 고쳐야 한다. 그리고 그 교범이 제대로 작동하게 해야 한다. 그게 선진국 대열로 들어가는 첫 관문이다.

 

 

이도선 ( yds@yna.co.kr )

    (전) 연합뉴스 경제부장, 워싱턴특파원(지사장)
    (전) 연합뉴스 논설실장
    (현) 연합뉴스 동북아센터 상무이사
    (현) (사)선진사회만들기연대 편집위원, 운영위원


'우리들의 것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작품사진모음  (0) 2011.09.26
고연전 뒷풀이(24일)-참살이길  (0) 2011.09.26
교육자 곽노현과 개그맨 강호동  (0) 2011.09.20
소박한 담의 아름다움  (0) 2011.09.16
'쌀밥에 고깃국'의 꿈  (0) 2011.09.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