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 길들이기
사람들은 대부분 부자가 되고 싶어 한다. 돈이 많으면 하고 싶은 일을 맘껏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웬만하면 하기 싫은 일은 하지 않아도 되는 게 돈의 위력이다. 아이들에게 장래 희망을 물으면 이것저것 많이들 꼽지만 특별한 사명감이나 취미 등이 아니라면 대부분 돈 많은 부자로 편히 살겠다는 생각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대부분 부자들을 비난하고 손가락질한다. 그저 비난하고 손가락질하는 정도가 아니라 증오 내지 혐오까지 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자기들은 부자가 되고 싶어 안달하면서도 정작 부자가 돼 있는 사람들은 가만 놔두지 않는다. 일종의 이율배반(二律背反)이라고나 할까?
과문 탓인지 모르나 외국은 그러지 않는 것 같다. 부자들이 으리으리한 성에 살든 말든, 명품 차를 굴리든 말든, 돈을 펑펑 쓰든 말든, ‘나와는 상관없는 일(None of my business)’로 치부한다. 우리는 툭하면 강남의 부자동네 타워팰리스가 어쩌고저쩌고 하며 입방아에 올리지만 필자가 두 번에 걸쳐 몇 년 살아 본 미국에서는 뉴욕 맨해튼이나 로스앤젤레스 베벌리힐스가 화제에 오르는 일이 별로 없다. 되레 국내에서 해외토픽으로 더 많이 접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부자들 욕하는 것은 그래야 할 이유도, 명분도 없는데 단지 남 잘 되는 꼴 못 보기 때문일까? ‘사촌이 땅 사면 배 아프다’는 속담까지 있는 것을 보면 국민성이 정말 그런지도 모른다. 게다가 요즘에는 ‘배고픈 건 참아도 배 아픈 건 못 참는다’라는 말을 아무 거리낌 없이 내뱉는다. 자기가 얼마나 노력했는지는 논외다. 중국의 대학교수가 “중국보다 한국이 더 사회주의적인 것 같다”고 말했다니 그저 웃어넘길 일만도 아니다.
부자들을 옹호할 마음은 전혀 없다. 오히려 욕먹을 짓을 한 부자가 참 많다는 생각이다. 다시 말해 외국 부자들은 존경받을 만하니까 존경받고 우리나라 부자들은 욕먹을 만하니까 욕먹는다는 얘기다. 얼마 전 국회 지식경제위원회가 ‘대기업의 사회적 책임 강화에 대한 공청회’에 허창수 전국경제인연합회장 등 경제단체장들을 불러 놓고 여야 가릴 것 없이 ‘뭇매’를 가한 것도 재벌에 대한 국민정서와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다만 정치권이 재벌을 욕할 자격이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로 치고.
최근 논란이 된 소모성 자재 구매대행업(MRO)만 해도 그렇다. 계열사들의 볼펜, 복사용지, 청소용품 등을 공동 구매.관리하는 것도 모자라 다른 기업과 정부 부처, 공기업 등에도 손을 뻗쳐 해당 업계의 중소기업들을 고사시키는 게 재벌이 할 짓인가? 게다가 MRO업체들은 대부분 총수의 비상장 ‘호주머니회사’로 계열사 일감 몰아주기에 힘입어 재산을 편법으로 불리거나 상속하는 ‘부(富)의 대물림 창구’ 노릇이나 했으니 욕을 바가지로 먹어도 싸다. 은행돈과 외국 차관을 독점하다시피 하고 각종 독과점 특혜까지 누려 가며 이만치 덩치를 키웠으면 이젠 철 들 때도 됐을 텐데....
이런 와중에 정몽준 전 한나라당 대표와 그의 삼촌, 형제들이 무려 5천억 원을 쾌척해 사회복지재단을 세운다는 얘기를 듣고는 ‘참 신선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체 출연액의 절반 가까이가 이들의 개인재산이라는 점이 특히 마음에 든다. 좀처럼 보기 드문 일이다. 우리 재벌들은 기업이나 직원들 출연금에 조금 보태고는 자기 이름을 앞세워 ‘△△△ 회장과 임직원 일동’으로 포장하는 게 거의 관행이다. 빌 게이츠나 워런 버핏 같은 미국의 이름난 자선가들은 예외 없이 개인재산을 내놓는다. 회삿돈 갖고 생색내는 치사한 짓은 하지 않는다.
기자 초년병 시절부터, 그리고 워싱턴 특파원을 지낼 때에도 ‘왜 우리 재벌들과 외국 재벌들은 기부하는 행태가 다른가?’ 하는 의문을 늘 품어 왔다. 우리 재벌들은 여윳돈이 없다는 게 겨우 찾아낸 해답이다. 기회만 되면 문어발 확장에 몰두하려니 돈이 수중에 남아 있을 리 없다. 덕분에 10대 그룹 총수의 개인 지분은 고작 1.1%밖에 안 되지만 내부 지분은 53.5%로 막강한 장악력을 행사하고 있다.
철강왕 앤드루 카네기는 65살이 되자 “부자인 채 죽는 것은 정말 부끄러운 일”이라며 당시로서는 어마어마한 거액인 5억 달러를 기부했다. 석유왕 존 록펠러와 자동차왕 헨리 포드도 각각 3억5천만 달러와 5억 달러를 내놓았다. 이들은 모두 부를 축적하는 과정에서 ‘악덕 자본주의자’로 지탄받기도 했지만 ‘통큰’ 기부로 ‘기부왕국’ 미국의 전통을 세웠다. 게이츠는 “부의 사회 환원은 부자의 의무”라고 했고 버핏은 최근 뉴욕 타임스 기고문에서 자기 같은 부자에게 세금을 더 걷으라고 촉구했다. 세계 최대 갑부 1, 2위인 이들은 부자들이 생전에 재산의 절반을 사회에 환원하는 ‘기부 약속 운동’을 벌여 호응을 얻고 있다. 이쯤 되면 부자라고 해서 존경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우리 재벌들도 이젠 구멍가게 수준을 벗어난 지 오래다. 세계적 반열에 올라 있다고 자부하는 기업도 적지 않다. 하지만 사회의 존경심은 아마 세계 꼴찌 수준일 게다. 자식들에게 호탕한 기업가정신을 물려줄 생각은 안 하고 빵집, 아이스크림가게, 떡볶이.순대집이나 내주면서 ‘반(反)기업정서’를 탓한대서야 설득력이 떨어진다.
다만 부자들이 나쁜 길로 가지 않도록 제도와 정책이 갖춰져야 하나 실상은 그렇지 못한 듯하다. 독일의 10배, 일본의 4.5배나 되는 상속세와 자선.장학사업에 퍼붓는 증여세 폭탄이 좋은 예다. 부자들이 편법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정비할 것이 있으면 서둘러 정비해야 한다. 대기업이라고 무조건 욕하기보다 일자리와 국부 창출의 일등공신으로서 합당한 대우를 해주고 격려를 아끼지 않는 사회적 분위기도 중요하다. 부자들이 축재보다 사회의 박수를 받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 해야 한다. 그것이 경주 최 부자나 유일한 선생 같은 존경스러운 부자를 오늘날 되살리는 지름길이다.
이도선
(전) 연합뉴스 경제부장, 워싱턴특파원(지사장)
(전) 연합뉴스 논설실장
(현) 연합뉴스 동북아센터 상무이사
(현) (사)선진사회만들기연대 편집위원, 운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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